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옥균 (문단 편집) == 평가 == 김옥균에 관한 평가에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당시 조선 정국에 비추어 선구자적으로 시세를 파악했던 개화사상가로서의 면모, 청의 내정 간섭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자 했던 [[갑신정변]]의 의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있으며, [[일본]]을 맹신하고 [[정변]]을 일으키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것이나, 민중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일본의 지원이 떨어지자 [[청나라]]의 반격으로 정변을 실패했다는 점 등에서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 갑신정변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유는, 개화 사상이 국민 속에 퍼지지 못하여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고, 개혁이 일본의 힘을 빌려 정변의 방식으로 추진됨으로써 국민의 반발을 샀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한 청군이 개입한 것도 실패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참조.]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 그는 후견인으로 탈아론과 제국주의를 설파했던 [[후쿠자와 유키치]]와 [[극우]]파의 원조인 도야마 미쓰루([[정한론]]의 지지자로, [[한자]]를 그대로 읽은 '두산 만'으로 흔히 알려졌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도야마 미쓰루에게 발탁된 다른 [[조선인]] 중 1명이 <[[야인시대]]>에 나오는 하야시([[선우영빈]])이다.] 김옥균 본인의 도의성을 떠나서 일본의 지원이 없어지면서 금방 몰락해버린 김옥균의 행보 때문에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일본의 장기말로 이용당했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다. 갑신정변 이후 [[한성 조약]]과 [[톈진 조약]] 등 조선이 외교적 고초를 겪게 된 것은 문제였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극우적 태도가 갑신정변의 실패를 계기로 나타났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적어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나 정한론의 경우 갑신정변 실패 후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더라도 김옥균이 생전이나 갑신정변 당시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그런 태도 변화를 예측하지 못했을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왕도의 개]]>에서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머물던 김옥균이 후쿠자와 유키치와의 대화 후 "저 분이 저렇게 변하다니."하고 그의 변화를 한탄하는 연출로 이러한 관점을 채택하고 있다.] 그의 유지를 이어받은 [[독립협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반민족적인 인사]]가 나온 점, [[백성]]의 지지가 없는 그들만의 개혁 때문에 여러가지로 한계를 가진 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때 본인이 원수처럼 여겼던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 복권을 꾀하자는 말에 낚인 것도 그를 평가절하하는 요소로 꼽고 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인사들 중 [[이상재]], [[남궁억]]처럼 [[독립운동가]]가 된 사례로 있는 만큼 일부 인사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독립협회와 [[개화파]]를 무조건 [[친일파]]로 규정하는 건 부당하고 독립협회와 대립한 [[황국협회]]에서도 [[민영기(조선)|민영기]] 같은 친일파가 나왔기 때문에 단순히 평가절하하긴 어렵다. 한편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도 처치하기 곤란한 인물이라 언제 [[조선]]에 넘겨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김옥균이 청나라를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 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위험 가능성이 있으니 [[안전]]이 확실한 지대로 피신을 한다는 말도 안되는 발상일 따름이다.[* 김옥균이 일신의 안전을 생각했다면 일단 [[미국]]처럼 조선 정부의 힘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망명]]을 떠났을 것이다. [[서광범]]이 그러했듯 말이다.] 오히려 김옥균이 일본을 떠나 청나라와 교섭을 할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김옥균에게 일본은 그저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이용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생각했기에 언제든지 손잡을 대상을 바꿀 수 있다는걸 잘 보여준다. 여하튼 넓은 의미의 친일이라는 이름이 붙어도 이상할게 없지만 [[한국]]에서는 친일파=[[매국노]]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일본에게 이용당했지만 매국을 했다고 단정하기 곤란해서[* 김옥균은 어디까지나 조선을 위해 일본을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막상 이용당한건 본인이고 실패했다는게 문제지만, 온건 개화를 지향하려는 [[명성황후]] 민씨의 일파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정의되지는 않는다. 일본에서는 세계사적 위치에서 '근대 조선의 [[혁명가]]'로 평가받는다. 김옥균을 일본에서 보호했던 자가 일본 [[개화]]의 아버지이자 현재도 일본 [[역사]]상 손꼽히는 [[위인]]에 들어가는 [[후쿠자와 유키치]]이며 김옥균의 조국을 위한 행동은 결과적으로 당대 일본에도 득이 되었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나쁘게 서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구글 재팬 등지 일본어 웹사이트에서 김옥균 [[이름]]을 쳐보면 김옥균을 높이 쳐주는 포스팅이나 게시글 등도 종종 발견되는데 그런 곳에서 그에게 붙는 칭호는 혁명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 애매한 '풍운아'라는 표현을 즐겨쓰는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다만 [[일본인]]들 사이에서의 고평가 중 어떤 부류는 "그가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었으며 일본의 힘을 빌려서 이를 성공하려 했던 인물이기 때문"일 수 있다. 즉, 일본인들의 입장에서는 당시 잘 나가는 일본을 따르려고 한 그를 혜안이 있는 자로서 칭송할 수도 있다는 것이며 그의 후원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였다. 일본의 김옥균에 대한 높은 평가는 부분적으로 신중하게 고찰해야 하는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이 일본과 가까웠던 개화사상가라는 점만 부각하여 김옥균의 업적을 부각시킨 적도 있기 때문이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0년에 낸 <새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 2탄에서 김옥균의 망명 동기에 대해 "후쿠자와의 진심을 알고도 망명을 한 건지, 후쿠자와가 근대 일본의 개혁가라서 존경해서 그랬는지 모르나 어찌 됐건 잘못된 선택이다"라는 식으로 딱 잘라 비판했다. 조선의 근대화를 빠르게 이뤄버리려던 그의 뜻은 갑신정변 이후, 당시에 잠시 존재했던 개혁의 흐름이 결과적으로는 실패와 동시에 오히려 몇 보 후퇴하게 만들었다. 온갖 사건들에 이리저리 휘둘렸던 [[고종(대한제국)|고종]], 급진 개화파에게 당한 수구파, 온건 개화파가 급진적인 개혁 움직임에 더욱 경계를 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