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옥 (문단 편집) === 학창 시절 ===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학교]] 입학시험을 쳤으나 낙방하고 [[보성중학교(서울)|서울 보성중학교]]에 입학했고, [[보성고등학교(서울)|서울 보성고등학교]](55회)[* 3년 후배인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다.]를 졸업했다. 보성고등학교 때 마침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서 잠시 고등학교 교편을 잡은 허혁 선생에게 영향을 받는다. 김용옥의 책들에는 종종 허혁 교수에 대한 존경이 표시되고 있다. 허혁 교수는 후에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 이후에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에서 신약성서신학을 가르치게 된다. 1965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경제학과[* 현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농경제사회학부] 입학시험을 쳤으나 수학 시험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둬 낙방하고, 2차로 [[고려대학교/학부/생명과학대학|고려대학교 이공대학 이학부]] [[생물학과]](65학번)에 65학번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악성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리는 등 건강상의 이유로 고려대학교를 중퇴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가 되기 위해 한국신학대학([[한신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너의 성향상 전제가 확실한 학문인 [[신학]]보다는 무전제의 학문인 [[철학]]이 어울린다"는 은사의 말을 듣고 한국신학대학을 또 다시 중퇴하게 된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462620.html|#]] 1968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에 편입했다. 참고로 2학년 편입학이므로 학번은 67학번을 부여받았다. 중고생 때 운동을 하다가 대학생 시절 악성 류마티스 관절염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군대도 [[면제]]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의사 권도원(權度沅, 1921 ~ 2022. 6. 30)의 치료로 몸이 회복되었는데, 이것이 그의 철학 체계를 수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며, 나중에는 한의학과에 입학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철학과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의학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김용옥은 본인의 저서[* 대화-김우중, 김용옥 나눔]에서 대학 시절 "나의 의식세계 속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환상적 이상향이었다." "나는 비록 제국주의 빚더미의 반쪽 폐허(대한민국을 일컬음)에서 살고 있지만, 조국의 반쪽(북한)이라도 깨끗하고 고결한 이상을 견지하고 있다는 기대는 줄곧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들은 소박하지만 정직하게 조국의 문제를 해결해나가고 있다.", "북한이라는 조국의 순결, 그것은 나의 미래며, 나의 꿈이며 소망이었다"이라고 밝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