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환(1932) (문단 편집) == 평가 == 별명이 '''꾀돌이'''였다. 그러나 말년([[2010년대]])의 김용환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가 나이 80 넘어서까지 꾀돌이(또는 박근혜판 [[최시중(1937)|최시중]][* 초대 [[방통위]] 위원장. MB의 멘토였다. 애초에 방통위 자체가 최시중을 위하여 만들어준 부총리급 자리나 다름 없었다.]) 소리를 들어야겠냐면서(...) DJP연합 초창기부터 정권 초기의 중요한 시기까지 김용환의 일처리를 지켜본 [[김대중]]은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된 자서전에서 김용환의 '''인재보는 안목'''을 다루는데 지면을 할애하였다. 당시 경제, 복지, 산업 관련 분야를 담당할 국무위원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추천한 인재들이 입각했는데, 김용환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데서 비롯된 찬사일 것으로 추정. 반면에 금융권을 틀어쥐고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한다는 [[기획재정부|재무부]] 출신 경제관료 인맥 즉 [[모피아]](Mopia) 그룹의 시초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김용환은 197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특혜적 정책금융을 법률적으로 제도화, 정권이 금융권을 통제하고, 그 금융권을 통해서 재벌을 관리하는 관치경제 시스템을 공고히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모피아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8.3 사채 동결 조치]]를 통해서 당시 무리한 중화학공업화와 오일쇼크로 인해서 망해가던 대기업들이 정권의 특혜금융으로 일제히 살아나게 되었고, 이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재벌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재벌들은 문제가 생겨도 모두 정권이 특혜금융으로 살려준다는 인식(모럴 해저드)을 가지게 되면서, 미래 전망이나 수익성 등은 신경쓰지 않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확장(문어발 경영, 방만 경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도저히 정권에서 막아줄 수 없는 규모까지 커지면서 일이 터진게 1997년 외환위기...] 2000년대 들어서 언론에선 보통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모피아 인맥의 대부로 지칭하는데, 공직에서 물러난 후 오랜기간 변방을 떠돌던 이헌재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시켜 준것도 김용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