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용환(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평가 == 1946년, 임종을 할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한국)|독립군]] 동지 하중환(河中煥)이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 없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도, 명문가 장손이라는 [[명예]]도 버리고, 일가[[친척]]들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는 파락호라는 경멸을 받으며, 심지어 외동딸에게마저 원망과 미움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 하겠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이러한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용환의 외동딸 [[김후웅]]은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는다. [[대한민국 훈장]]을 받는 그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배[* 아버지의 경북 북부지방 방언] 참봉 나으리'라는 글로 발표하였으며, 6년 뒤인 2001년에 향년 84세로 사망. 글의 전문은 이곳에서 볼 수 있다. [[http://www.cheongson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74|#]] ||그럭저럭 나이 차서 16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서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어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 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여담이지만, 그의 장인인 [[이중업]]은 1914년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리고, 1919년 베르사유 회담에 보낼 청원서에 넣을 강원도, 경상북도 지역의 유지들의 서명을 받고 중국으로 가던 도중 사망했다. 그의 장모인 [[김락]]은 예안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제국 경찰에 붙잡혀 56세의 나이에 [[고문(범죄)|고문]]을 당하다 실명했다. 처남을 비롯한 그의 처가 역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안동 인근은 퇴계의 학맥이 통혼 등을 통해서 엮여 있었는데, 김용환의 장인이 예안의 의병장인 [[이만도]]의 아들 이중업이고 이중업의 동서가 고성 이씨 [[이상룡]]이다. 김용환의 딸 김후웅 역시 청송 의병의 주역인 마평 서씨 서효원의 손자 며느리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대규모 종가들이 친일로 기운 사례가 많은 데 비해서 안동 인근은 신통할 정도로 인맥이 독립운동으로 기울었다. [[김흥락]]의 제자 중 독립운동으로 훈장을 받은 이가 60명이라는데, 안동과 주변 시군에서 독립운동으로 포창 및 훈장을 받은 이들을 통틀면 약 7,800여 명이 나온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까지 합친다면 만 명 단위가 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문화방송|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12년 5월 6일자 방송분에서 이 내용을 다룬 바가 있다. EBS 역사채널 e에서도 다룬 바 있다.[[http://www.ebs.co.kr/replay/show?prodId=10000&lectId=10121917&gnbVal=1&pageNum=14&srchType=&srchText=&srchYear=&srchMonth=|#]]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정치인, 기업인들만 줄줄이 나오고 그의 이름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2013년 8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는 것으로 수정되었다. 하지만 2014년 3월 확인결과 맨 위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건 네이버뿐만 아니라 다음도 마찬가지다. 반면 2016년 2월 4일 현재 구글의 경우 검색결과 1위는 [[나무위키]]의 현재 항목이다. --근데 구글은 원래 [[위키니트|자기가 많이 들어가는 사이트를 상위에 띄운다(...)]]--2위는 위키백과의 독립운동가 김용환 항목, 3위는 위키백과의 김용환 항목이 검색되었다. 검색 결과 최상단에는 '''김용환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라는 설명과 생전 사진이 올라와 있다. 외산 검색엔진이 독립운동가 검색결과를 우대해 주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네이버 지식백과에는 아예 등록조차 안 되어 있다.[* 다만 네이버, 다음은 방침 자체가 동명이인은 역사인물보다는 현재 활동중인 인물을 올리는 것으로 보인다. [[황희]]를 검색해도 세종시대 명재상으로 황희가 아닌,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인 황희나 배우 황희가 상위에 노출된다. 이름 모를 한국인이 없는 역사인물에 대해서도 이런데 인지도 낮은 다른 인물을 상단에 노출시킬 가능성은 전무할 것이다. 구글은 반대로 황희 역시 명재상 황희의 위키백과가 최상단에 노출된다.] 참고로 동명이인의 독립운동가도 있다. 1933년에 옥에서 고문을 받다 사망한 사람이다. 그나마 다행히 이 사람이 네이버 김용환 검색어 지식백과에 수록은 되어 있다. 2015년 6월 21일자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에서 145회로 파락호 김용환 특집을 다루었다. 김용환의 행적과 파락호로의 위장과정, 그리고 김용환의 처가 이야기가 같이 다루어졌다. 2017년 8월 15일 제 72주년 광복절 기념식 행사중 그날이 오면 1부 주제로 김용환이 나오면서 11시 20분 기준 포털사이트 다음 검색어 기준 '파락호 김용환' 으로 실검 5위를 차지했다. 2019년 2월 24일 SBS 런닝맨 삼일절 100주년 특집에서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6264'과 함께 언급되었다. 2019년 3월 10일 KBS1 '한국인의 밥상'에서는 3.1운동 100주년 기획 편으로 학봉종택 손님상을 소개하면서 파락호 김용환의 일대기와 위의 김후웅 여사의 시까지 같이 소개하였다. ~~[[김동인|진짜 파락호는 동시대에 따로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