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우중 (문단 편집) ===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 이후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친척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서 바이어로 근무 하다 1967년 독립해 대우실업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창업 이후 유창한 영어 실력,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린 뒤 해외 회사에 오퍼를 내고, 계약이 성사되면 그 때 돈을 갚는 독특한 자금동원 능력,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맥[* 아버지가 교장일 당시 대구사범학교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재학하고 있었다.]과 경기고 인맥 등을 잘 활용해 창업 5년만에 100만 달러 수출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두환]], [[손영길]]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 [[국군기무사령부|육군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다가 경기고등학교 동기생 이종찬이 중앙정보부에 근무한 덕에 큰 화를 면하였다. 이후 신군부의 비호를 받아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대우전자]]),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등을 인수하면서 대우를 10대 재벌로까지 키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4555365|기사1]] [[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32248|기사2]] 특히 자동차 회사 인수 후에는 독일 만(MAN) 사와의 기술 제휴로[* 명문대 출신 또는 현장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대우의 젊은 과장급 기술자들이 이때 독일로 산업연수를 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중요한 경험을 쌓게 된다.] 잔고장이 적은 MAN 엔진을 개발, 이전까지 우리나라 '''운수업계의 골칫거리였던 차량 정비관련 비용을 크게 줄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이후 [[동유럽]]의 [[민주화]], 시장개방 바람 등에 편승해 '''세계 경영'''을 주창하며 구 공산권 국가에 진출해 전 세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대우의 수입차 생산 거점기지였던 [[폴란드]]는 지방 공무원의 관용차가 대우차 구종이었고, 수도 [[바르샤바]]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까지 있다고 한다. 재벌 회장중에서는 제일 [[언론플레이]]를 잘하는 축이었고, 1989년 출간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도 사실 언플의 일환이었다. 다른 언플성 책으로는 도올 [[김용옥]]이 대우측에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여 김우중의 출장에 동행하고 난 후 쓴 기행문인 "대화"가 있다. 이 저서에서 김용옥은 상당히 김우중을 미화했는데, 당시 김우중은 다른 재벌 회장에 비하면 매우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지만.. 어쨌든 IMF 이후에 밝혀진 김우중의 비리를 보면 이 책은 김용옥의 [[흑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룹 이미지 개선을 위한 것으로 보기에는 이 책은 '''구라''' 투성이였다. 이 책에서는 자신이 소명의식으로 기업을 하며 대우는 비생산적인 서비스업은 절대로 손 안대고, 자기는 자녀들에게 절대로 재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실제 김우중은 자신을 전문 경영인이라고 자처하고, 대우 사태 직후에도 2~3년 안에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없이 물러날 것을 채권단에 [[http://www.ilyoeconom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02|약속했다.]] 그리고 이 말은 다른 의미로 사실이 되었다(...). "대한민국 원조 [[샐러리맨]]의 [[신화]]"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작 자체를 샐러리맨으로 시작해서 재벌 총수까지 되었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틀린 말은 아니고]], 성장 과정에서 집안 배경, 인맥, 언플을 적극 활용하여 샐러리맨의 신화를 썼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이 양반은 워커홀릭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