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우중 (문단 편집) == 후일담 == 2014년 8월 신장섭 싱가폴 대학 교수와의 대담 형식으로 회고록 '김우중과의 대화'를 출간하고 출판기념회에 잠깐 참석해 [[김대중]] 정부 경제관료들과의 악연이 대우를 해체한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일부에서 제기하는 김우중 회장이 대북사업에 소극적이어서 DJ정부에서 피해를 봤다는 [[음모론]]에 대해서는, 자신이 [[김일성]], [[김정일]]을 수십번 만나서 독자적 커넥션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밝혀 부정하였다. 전반적인 인터뷰의 요지는, '''대우라는 기업의 낙관적 전망을 통해, 결국 투자나 추가 대출을 설득'''하는 CEO의 그것이다.[* 김우중은 차입으로 성공해서 차입으로 망했다라고 요약이 가능할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차입을 바탕으로 기업을 운영한 인물이다. 심지어 기술개발도 빌려오면 되지않느냐라는 식으로 생각할정도로 인맥을 통한 경영에 집착했는데, 이러한 가치관은 과도한 차입으로 회사에 큰 타격을 준 이후에도 변하지않은것으로 보인다.] 몰락 후에는 추징금을 피해 사실상 재산의 대부분을 가족-친척들에게 분산시켜놓은 상태이다. 아들들에게는 유럽에서부터 동남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는 대규모 골프장 운영을 맡겨놓은 상태이며, 아내와 딸은 서울 종로 한복판에있는 아트선재센터의 운영권을 맡겨놓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은닉재산 추징을 위한 전두환법이 나오면서 김우중 전 회장의 재산 추징도 가능한게 아닌가하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전두환법은 어디까지나 비리공무원을 위한 추징법인지라 김우중 전 회장은 법의 적용을 벗어났다. 사실상 완전히 대우그룹에서 은퇴했지만 여전히 대우그룹과는 끈끈한 커넥션을 보유중인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우그룹의 계열사가 소유중이던 힐튼호텔을 대우그룹이 정리하는 과정에서 김우중 전 회장과 임대차계약을 맺었는데, 꼭대기 최상층 집무실을 25년동안 1년에 12만원이라는 말도안되는 가격으로 계약을 맺은 사실이 밝혀지기도했기때문이다.[* 힐튼 호텔 최상층 집무실쯤되면 1년이 아니라 한달에 수천만원단위로 계약이되는게 일반적이다. 다행히 해당 계열사가 힐튼호텔을 다른 기업에 팔면서 이 기묘한 계약이 드러났고, 법원 소송까지 올라가서 결국 이 터무니없는 임대차계약은 무효화되었다.] 최근에는 주로 회고록 등의 출판과 경영자 교육을하며 베트남을 중심으로 주로 동남아권에서 활동중인데, 국내에서는 수입이 발생하면 바로 추징이 진행되므로 국내에서 다시 사업활동을 재기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면된다. 참고로 [[미국]]에서 김우중급의 분식회계를 지시한 [[엔론]] 전 회장 케네스 레이는 24년형을 받았으나, 복역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사실 김우중급이라고 말하는것도 웃긴게 엔론의 분식회계규모는 15억달러 우리나라돈으로 약 2조원정도였지만 대우의 분식회계규모는 41조원+사기대출 10조원을 포함해 50조원이 넘었다. 엔론의 수십배규모로 분식회계를 저지른것이다. 엔론은 김우중의 대우그룹에비하면 새발의 피다.] 이 사람은 매출액만 터무니없이 부풀렸을 뿐 순이익을 부풀린 건 단 20%다. 아예 손해를 이익으로 부풀린 김우중보다는 낫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케네스 레이는 사실 바지사장 수준에 가까웠고 실제로는 그 밑의 CEO가 벌인 일이다. 무관심했던 케네스의 문제도 크지만 실제로 죄를 저지른 CEO는 더 큰 잘못이다. 당연히 이쪽이 더 많이 떼어먹었고 이쪽도 케네스 이상의 처벌을 받았다. 사실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드물다는 말이 있듯, [[IMF 사태]] 전까지 거의 모든 대기업들이 분식회계를 저지른 의혹을 받는건 사실이다. 그렇게 해서 절세 또는 금융혜택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고로, 그 시절 분식회계는 대기업들의 관행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다만 대우의 분식회계 규모는 다른 대기업들과 비교해봐도 남다른 규모긴했다. 젊은시절부터 차입경영을 선호했던 김우중은 당시 한국의 경영자들중에서도 특히나 분식회계에 거리낌이없었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1998년 새로 출범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 금감원장을 통해 기업 부채율을 200%로 감축하도록 30대 그룹에 강공 드라이브를 건 것은, '''첫째''',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같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기세를 보이는 30대 그룹도 평균 부채율이 387%로, 1997년부터 1998년 2년 동안 재계 100위귄부터 상위 30대 기업까지 매월 도산 소식이 들려오는 현실이었다. 부채율 300% 초반의 거평 그룹 임원이 부도 6개월 전까지 "우리는 평균보다 낮은 양호 수준"이라고 인터뷰했을 만큼, 기업인들이 은행빚의 무서움보다는[* 물론, "이자는 휴일도 없다"는 격언이 당시에도 있었으나, 대출액수가 큰 대기업들이 은행이 주시할만한 거액을 빌리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장면도 많았던게 성장경제 당시의 풍경이었다고 한다.], 과감한 투자에 시선을 돌려 앞만 보고 달린 후유증이 경제 전반을 덮은 상태였던 것. '''둘째''', 처음부터 예외를 두면 추후 빠져나갈 수 있는 허점으로 악용될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계열사 업종 고려없이 200%로 감축하는건 말이 안된다."는 주장이 나왔으며, 자동차, 조선업의 특성을 고려해보면 부채율 200% 유지는 실현할 수가 없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이 역시 [[이헌재]] 금감위장이 악역을 맡았을 때 이미 얘기가 나와, 이 회사 사정, 저 회사 사정 감안하지 않고 예외 없이 30대 그룹 구조조정안 일괄제출이 [[http://mnews.joins.com/article/6899201|통보된]] 상황이었다. "구조조정 작업에 소홀히 하며, 오히려 막대한 부채를 빌미로 배짱을 보였다."고 말한 [[강봉균]] 전 경제부총리의 입장, 과거 대우통신 상무 직위로 일하던 시절 한국반도체 인수 실패로 계약금 회수에 몰두하다 자진 퇴사한 이헌재가 한국신용평가 사장으로 취임한 후 당시 다른 5대 그룹보다 재무 평가에서 계속 불리하게 레이팅 되었다는 대우맨의 증언, 제 3자의 입장에서 봤을때 [[국민의 정부]] 경제 관료들에게 반기를 들며 밉보여 꼬투리를 잡혔다는 의견 등이 있다. 여담으로 [[국민의 정부]]에서 이헌재는 낙하산으로 금융감독원장 자리에 앉기도 했다. 하지만, [[김대중|DJ]]의 야당 총재시절 신문에 연재되는 무협지면까지 빌려 교묘하게 DJ를 깎아내렸던 [[중앙일보]]와[* 단,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젊은 시절부터 관심과 공부가 깊었던 [[홍석현]] 사장의 영향으로 장기적인 관점을 유지. 의견 일부만 떼놓고 보면 DJ의 주장과 구분이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 상관격인 [[삼성그룹]]에게도 대통령 측근들이 손을 대지 않았던 점이나[* 5대기업 회장단과의 만찬에 참석하기 前, [[이건희]] 회장이 직원들에게 "대기업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주의를 단단히 주었지만, 만찬이 끝난 후 이례적인 밝은 표정으로 나오는 장면이 포착돼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문화일보]]에서는 아예 1면 사진 밑에 "환한 모습의 이 회장"이라 써놨을 정도][* 포니 정으로 잘 알려진 고 [[정세영]] 현대자동차 전 회장의 자서전에는 5대그룹 회장단과의 만찬에서 '''"수출 잘 하는 기업은 업고 다니겠다."'''는 말을 대통령당선자가 했다고 한다.], [[여소야대]] 국면, [[IMF 사태|당시 경제적 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리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 해도 자신을 [[http://mnews.joins.com/article/6909300#home|기술자]]로 여겼던 이헌재의 행동반경이 보복 수준에 이르기 힘들다.[* 특히 창당 후 대부분의 세월을 강한 야당으로 일관했던 [[한나라당]]에서 가만 놔두질 않는다.] 비록, 호시절에 다른 5대 기업보다 기술개발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긴 했지만, '''동유럽 및 동남아시아 시장을 선발적으로 개척'''한 상태였던 것, '''조선소와 자동차회사를 운영하며 축적된 고급인력'''[* 미국의 로켓발사대를 뜯어다 조선소 시설로 개조하는 능력과, [[현대자동차]]처럼 신차개발시 부품까지 통째로 바꾸기보단, 기존 것에 개량한 부품을 넣는 방식으로 결과적으로 소비자 부담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들이다. 비록 자금사정으로 인해 이런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뒷받침해줄 자동차 기술진들은 김우중 회장이 의욕적으로 독일로 연수를 보내 배우게 했던 이들이었다.][* 즉 대우차를 보유하고 관리만 잘 하면, 후속 신차 발표 및 업그레이드 모델에 적용된 신부품을 구해 끼워넣기만 해도 새차 산 것과 다를 바 없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미국차들처럼 튼튼하게 차체를 만든다는 강점이 있었기 때문에, 세일즈 포인트로서도 유용.] 등을 감안할 때, IMF 시기에 있었던 위기를 단지 신정부의 군기잡기로만 치부하지 않고, '''좀더 심각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1999년의 [[대우그룹]] 사태의 모습이다. 미국 GM은 쉐보레 통합 이전 GM 대우 시절 경영 정상화에 대한 자금 지원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금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다가 채권단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여 대우자동차는 GM에게 단물만 빨리고 "제 2의 쌍용차"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국내 전문가들을 통해 제기된 바 있었다. 실제로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의 관리를 받으며 '''Government Motors'''라 불리기까지 했던 [[제너럴 모터스]]의 위기탈출 1등공신도 바로 대우가 보유한 [[쉐보레 스파크|소형차 기술]]이었지만[* 밥 루츠 전 부회장의 자서전인 [[빈 카운터스]]에도 나오지만, 석유가 풍부한 미국의 여건상 힘좋고 튼튼한 차량이 호황기의 주력상품으로 개발되고 소형차 개발은 등한시해, 1970, 80년대에 일본 제조사들이 치고 들어올 빈틈을 내주었다. 다만 이 책이 지적하는 정확한 내용은, 상황이 안팎으로 안 좋아지자 배기가스 및 연비규제와 당장의 시장 변화, 그리고 비용절감을 통한 이익 극대화에만 눈이 앞서 모든 라인업을 급히 소형화, 앞바퀴굴림화하다가 회사의 평판을 말아 먹은 건에 가깝다.], 그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1934755#cb|직원들]]은... 전 세계 6개 연구소, 16개 생산기지, 19개 현지법인, 78개 해외판매망을 거느렸던 대우자동차가 GM의 생산기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린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따름이다. [* 이미 (개인의) 성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아군보다 적군 진영에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이나 세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경우가 있다. 1999년 위기 때 손을 내밀었던 [[제너럴 모터스]]와 한국 정부 중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 '''참고 기사(김우일 前대우그룹 구조본부장 대행 단독 인터뷰):'''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325_0010861182&cID=10402&pID=10400|기사 1]]''' '''[[http://car.donga.com/List/Indie02/3/all/20120324/45005455/4|기사 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