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 (문단 편집) == 개요 == || [[파일:약산img2.jpg|width=100%]] || || △ 가장 잘 알려진 사진. 해방 이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 || [[일제강점기]] 시절 [[좌파|좌익]]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유공자|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독립운동가로서는 3.1 운동 이후인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독립운동가)|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그는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고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한인 군관 육성에 있어서 김구와 김원봉은 지속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협력했다. #1, #2]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 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좌익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고,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8년에 월북했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의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으며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인민검열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로동상으로 이임하였다. 후임 인민검열위원장으로는 1953년 1월 23일, 리기석이 임명되었다. [[6.25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또다시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1958년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