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원봉/일생 (문단 편집) == 유년 및 청년 시절 == [[서당]]에서 [[한문]]을 배워 8살 때 [[통감]]을 읽었다. 11세 때 밀양공립보통학교(현 밀양초등학교)에 편입하여 다녔고, 13세 되던 1910년 [[민족주의]]자 을강(乙江) [[전홍표]](全鴻杓, [[1870년]] [[1월 3일]] ~ [[1929년]] [[8월 11일]], [[2018년]] 건국포장 추서.)가 사재를 털어 세운 동화중학 2학년에 편입하였다. 전홍표[* 전홍표는 동화중학의 교장이었다.]를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한 일제에 의해 동화중학이 폐쇄되자 50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표충사]]에 들어가 한 1년 동안 [[손자병법]], [[오자병법]] 등 중국병서를 읽었다. 1913년 [[경성부]]로 가서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다니다가 그만두고 [[중국]]으로 [[무전여행]]을 떠나니, 17~18세 때였다. 이때 자신의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백민(白民) 황상규(黃尙奎, [[1891년]] [[4월 19일]] ~ [[1931년]] [[9월 2일]],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가 창설자 중에 하나였던 대한광복회의 항일무장투쟁을 지켜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대한광복회의 강령은 이후 [[의열단]]으로 이어지게 된다. 김원봉이 [[톈진시|톈진]]으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는 덕화학당(德華學堂)에 들어간 것은 19살 때인 1916년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는데 [[일본]]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었다. 독일로 갈 생각을 하고 덕화학당에 들어갔던 것이니, 독일에 협력하면 독립을 할 수 있으리라는 대한광복회 회원들의 정세관에 따른 것이었다. 독일어를 배우기 전 우선 중국어를 배우다가 1917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광복회 회원들의 희망과 다르게 중국이 일본 측에 가담하여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바람에 덕화학당은 폐쇄되고 김원봉은 1년여 고국에 머물게 되는데, 그때에 사귀게 되는 사람이 김두전과 이명건이었다. 황상규가 세 사람에게 의형제를 맺게 하고 각각의 호를 지어주었는데, 그렇게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 이명건은 '여성(如星)'이라는 호를 갖게 되었다. 1918년 9월, 이 세 사람은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남경]]에 있는 [[금릉대학]](金陵大學)[* 현재 중국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난징 대학의 전신이다.]에 입학하였다. [[미국]]인이 운영하는 [[기독교|기독]]계 계통 학교로, 세 사람이 함께 들어간 곳도 영어과였다. 1919년이 되자 김원봉은 여운형이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한국 대표로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세상에 호소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이 한국 같은 약소민족을 위해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주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김약수]], 이여성과 만나 [[독립군/한국|독립군]] 양성을 상의하고자 [[지린성|길림]]으로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