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유신 (문단 편집) == 일화 == 설화적 기록을 수록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던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보다 좀 더 설화적이고 비현실적인 일화가 다수 담겨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야사(역사)|야사]]가 전한다. * 김유신이 수련한 경주의 [[단석산]] 정상엔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신검으로 돌을 갈랐다는 설화가 담겨있는 돌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 일화를 담고자 함인지 [[연개소문(드라마)|드라마 연개소문]], [[선덕여왕(드라마)|선덕여왕]] 등에서는 김유신이 꾸준히 바위를 내려치는 수련 끝에 결국 갈라버리는 장면이 나왔다.] * [[백석(고구려)|백석]]이라는 고구려의 자객이 김유신을 죽이러 화랑으로 위장했는데 나림, 혈례, 골화라는 세 여신이 나타나서 이를 알려줘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에 따르면 [[영양왕]]에게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쟁이 추남이 죽을 때 적국의 대장으로 태어나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맹세했는데, 왕이 추남이 서현의 부인 = 만명부인의 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 하여 미리 제거하기 위해 자객을 보낸 것이라고 한다.[[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4&itemId=sy&synonym=off&chinessChar=on&page=1&pre_page=1&brokerPagingInfo=&position=2&levelId=sy_001r_0020_0350_0020|#]] 근데 정작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김유신은 너무 나이가 들어 골골거리고 있었다. 물론 명목상으론 고구려 정벌군의 최고사령관(大幢大摠管)이었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관련이 없는 건 아니다. * 특히 유명한 건 [[고려시대]]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화랑이던 김유신은 어느날 친구 모가대, 우기나와 함께 다니다 기녀인 [[천관녀]]를 만나 사랑해 그녀와 교제했는데, 어느 날 어머니 [[만명부인]]이 그 꼴을 보고는 "나는 이제 늙었다. 네가 커서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하여 왕과 부모에게 기쁨을 안겨줄 날을 밤낮으로 고대해왔는데 어찌 너는 [[주색잡기|술과 여자나 쫓아다니느냐]]"라고 울면서 말했다고 한다. 아예 출가를 하라는 선언까지 떨어지자 김유신도 엎드려 울며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 해서 천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고 다시 그 집에 들르지 않기로 어머니께 맹세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건반사|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로 집에 돌아가던 중, 말이 평소 길 가던 버릇대로 그녀의 집 앞에 멈춰서자]] 천관이 즉시 달려나와 영접했는데, 정신을 차린 김유신이 상황을 깨닫고 천관에 대한 마음을 눌러참고 '네가 어찌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리 하였느냐'며 [[남탓|말의 목을 그대로 베고 그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다른 설화와 조합하면 그 말이 다름아닌 [[용마]]였다고 한다.] 현재 김유신의 집이었던 제매정택과 천관녀가 살았던 곳으로 알려진 천관사는 직선거리로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천관녀는 그의 무정함을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향가]]를 지었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의 결단에 감동하여 신녀직을 그만두고 비구니가 되어 절에서 지내다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후에 김유신도 죄책감을 느꼈는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천관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터라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그녀를 위로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도 나와있다. 배우는 [[이종수(영화배우)|이종수]].] * 이것과 별개로 일화일 뿐 사실관계는 밝혀진 봐 없지만 솔직히 김유신의 말은 그저 주인을 태운 것 밖엔 없는데 무슨 잘못을 해서 목이 잘려 죽은 거 냐며 김유신을 까는 밈도 있다. 이 일화를 한때는 위인전에 싣기도 하고 국민학교 시절 정신교육이라며 찬양하기도 했으나[*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옳은 길을 추구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아무런 교훈이 없는 얘기는 아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묘하게 웃긴 상황이라 그렇지.], 그 시대라고 무분별하게 찬양했던 것은 아니다. 일례로 고려시대 문신인 '이공승'(1099~1183)은 천관사의 이름의 유래를 말하면서 느낀 점을 시로 수록하였는데 간접적으로 까고 있다. >寺號天官昔有緣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술 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 또 다른 해석으론 1990년 월간 [[보물섬(만화잡지)|보물섬]]에 연재하던 박문윤 만화 "우럭이"에서도 아버지가 사고뭉치 아들인 정우럭에게 이 일화를 이야기하자, 우럭이는 "아니? 대체 말이 잘못한 게 뭔데요? 못난 주인을 찬양하고자 말을 함부로 죽인 것을 찬양하나요? 그리고, 요즘 그러면 동물보호단체들에게 항의나 고소를 당하고 아주 고생할텐데요? 1300년전 일을 왜 지금 해도 된다는 것처럼 가르치면 안되잖아요? 말이 가엾잖아요!" 라고 이야기하여 아버지가 아무 말 못한다. 이걸 멀리서 듣은 아우가 '형은 사고뭉치지만 때론 아버지도 입다물게 하는 지식이 있다. 그 지식을 공부로 안 쓴다고 아버지가 아쉬워하게 하지만'이라고 생각했다. * [[비담의 난]] 때 김유신이 연을 띄어 반란군의 사기를 꺾자 이후 비담은 직접 2만의 대병력으로 왕위를 찬탈하려 드는데, 김유신에게는 그 절반 병력인 1만밖에 없었다. 이에 김유신이 비담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대항하는 자는 9족을 멸하겠다며 진군해 비담의 병력과 대치하자 김유신을 본 병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다. 김유신은 3만 병사를 이끌고 그대로 진군해 비담과 반란에 가담한 9인의 9족을 멸하고, 투항한 2만 명의 죄는 전혀 묻지 않았다.[* 다만 툭 까놓고 말하자면 선덕여왕-진덕여왕 교체 시절은 신라가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이런 마당에서는 2만명의 병사'만'을 처형하는 것으로도 큰 손해인데(병력으로 쓸 수 있을 정도라면 요역이나 농사 등에도 투입할 수 있는 노동력으로도 쓸 수 있다는 의미인데 그들을 다 제거하는 거다.) 그들의 9족까지 멸한다면 그 숫자는 끝없이 올라갔을 것이다.] 다만 삼국사기 본기에서는 오히려 30명 정도가 죽었다고 되어있다. 지휘관 급 인물들을 처형했는지는 불명. * 정치적 입지를 올리기 위해 [[태종 무열왕|김춘추]]와의 정략결혼을 시도했는데, [[축국]] 놀이를 하다가 일부러 김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터트린 다음, 옷을 고쳐주겠다면서 자기 집으로 데려와서 누이동생 문희를 방으로 들여보내서 분위기를 조성, 성관계를 가지게 했다. 그런데 문희[* 그 전에 언니 [[보희]]가 산에서 소변을 봤는데 그게 수도를 가득 메우는 민망한 꿈을 꿨다. 문희가 그 꿈을 샀는데 그게 왕후가 되는 꿈이었다는 거다.]가 임신을 했는데도 김춘추는 정식 혼인한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모른 척을 했는데, 이에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아이를 임신해서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문희를 화형시키겠다면서 일부러 젖은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펴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오르게 해, 그것을 본 지나가던 [[선덕여왕]]이 중재를 하여 혼인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 상장군으로 지낼 때 오랜 기간을 동안 전쟁터에서 보낸 뒤에 다시 전쟁터로 나갈 때 마침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집에 들르지 않고 전령을 보내 우물물 한바가지만 떠오라 한 뒤 말 위에서 마신 뒤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 하고 다시 전쟁터로 떠났다. 이를 본 군사들이 "상장군님은 집을 눈 앞에 두고 들르지 않는데 우리가 집 걱정하겠는가?"라는 말과 함께 사기가 하늘을 찔러 적을 무찔렀다고 한다. 그 우물은 현재 그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에 '경주 재매정'이란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201~300호#s-2.5|사적 제24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소정방]]과 기싸움을 한 다음날, 소정방이 출병하기 전 하늘을 나는 까마귀를 보고 점을 쳤는데 불길한 점괘를 받고 겁을 먹었다. 김유신은 검을 뽑아 까마귀를 가리켰는데 그대로 오체분시되었다고 한다. 이 일로 소정방이 마음을 다잡고 출정할 수 있었다. [[https://blog.naver.com/szvaxx/222453806730|#원문]] * 당나라 고종이 신라같이 조그만 나라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당태종과 똑같은 '태종'의 명칭을 쓰는 것에 대해서 신라 신문왕에게 사신을 보내 따지니, 신라가 비록 작은 나라이긴 해도 김유신을 얻어 삼국통일을 이뤄내 태종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이유를 밝히니 납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https://blog.naver.com/szvaxx/222453812971|#원문]] * [[대동운부군옥]]라는 책에는 요괴를 만났다는 일화들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죽통미녀]], [[노옹화구]] 문서 참고. ||<-5> [[천마도|[[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width=40]]]]'''[[풍월주#s-3|{{{+1 {{{#ffffff 신라의 풍월주(風月主)}}}}}}]]'''[br],,[[박창화|{{{#ffffff 박창화}}}]]{{{#ffffff 가 필사했다고}}} [[위서|{{{#ffffff 주장하는}}}]] [[화랑세기|{{{#ffffff 화랑세기}}}]]{{{#ffffff 의 기록}}},, || || 14대 호림공 김호림 || {{{+1 ←}}} || '''{{{#ffffff 15대 유신공 김유신}}}''' || {{{+1 →}}} || 16세 [[보종#s-1|보종공]] 설보종 || * 위서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에 의하면 15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가 김유신이고, [[삼국유사]]에서는 18세 때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이 되었다고 한다. * [[신문왕]] 때 [[만파식적]]을 보낸 것도 김유신과 문무왕의 혼백이라 한다. 또한 후에 [[후삼국시대]]가 형성되고 신라가 망할 때가 되자 왕궁에서 수많은 군사의 혼령들이 울며 김유신의 묘로 들어갔다는 전설이 있다. * [[조선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 국가에서 현판을 내려주는 것으로 사립학교격인 서원에 대한 일종의 국가 공인인 셈이다.]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 지금의 서악서원의 전신으로 원래는 김유신 한 사람을 위해 지어졌던 것이 나중에 설총과 최치원까지 모시게 되었다.]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된 것과[* 서악정사의 사액이 조정에 건의된 것은 인조 1년(1601년)의 일이다.] 관련해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회의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 하며 김유신의 위패를 빼고 사액을 청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 자리에서 논의가 나지 않아 회의를 파하고 얼마 뒤, 이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몰려와 서생을 잡아다 뜰에 꿇어앉히고, 병사들을 거느린 김유신이 그의 앞에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그렇게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냈으니 그것이 효인데,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쳤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사망했다.[[https://blog.naver.com/szvaxx/222428050114|#원문]] * 많은 기담과 전설을 남겨서 뭔가 영력이 강한 장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인지 김유신은 한국 전통 [[무속신앙]]에서도 신으로 모시는 역사인물이다.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서는 [[https://youtu.be/3VSzp5GFQkM|김유신을 산신으로 모시는 사당들도 있다(7분부터).]] 강릉 지역 구비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산신령]]이 된 김유신이 [[대관령]]의 소나무를 모두 병사로 보이게 해서 왜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한 [[경상북도]] [[군위군]] 지역에서도 김유신을 산신령으로 모시고 신당이 있고, 그 외에도 오늘날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김유신을 모시는 신당은 매우 많다. 김유신 신앙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사당은 아래와 같다. * [[경기도]] [[화성시]] 금산사 * [[강원도]] [[강릉시]] 화부산사 * [[충청북도]] [[진천군]] 길상사 * [[충청남도]] [[부여군]] 부풍사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사 * 전라북도 [[부안군]] 보령원 * [[광주광역시]] [[북구(광주광역시)|북구]] 장렬사 * [[경상북도]] [[군위군]] 효령사 *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서원 * [[경상남도]] [[진주시]] 남악사 * [[경상남도]] [[양산시]] 취서사 * [[울산광역시]] [[남구(울산광역시)|남구]] 은월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