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일성종합대학 (문단 편집) == 역사 == 의외로 설립이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북한은 처음에는 김일성 유일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비록 소련을 등에 업고 들어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긴 했지만 국내파·친소련파·친중국파 등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지지가 아주 확고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초창기의 김일성은 최유력자일 뿐이였지 절대권력자는 아니였다. 이런 상황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종합대학을 설립할 예산을 돌려 경제 건설을 하자는 주장이 우세했고, 경제 건설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 기존의 전문학교들을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으며, 그 동안의 대학 교육 수요는 소련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자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력자 중 한명에 불과했던 김일성은 여기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서울대학교|미군정 법령 제102호가 제정 및 공포되어 그 때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제국의 제국대학령을 폐지, 대체하여 설립된 대학]]이 출범'''하면서 자극을 받은 김일성이 종합대학 설립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당시 김일성은 종합대학 설립에 의욕적이어서 군사 예산까지 전용해서 종합대학 설립에 보탤 정도였다. 그리고는 청원 형식을 빌려 대학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개교를 강행했다. 하지만 급하게 설립하다 보니 설립 초기에는 제대로 된 교사를 갖추지 못하고 평양에 산재한 여러 근대적 건물에서[* 서울대학교도 개교 직후부터 관악 이전 전까지는 각 단과대학들의 전신 학교들이 있던 곳에서 나누어 강의를 했다.] 강의를 진행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 평양에 있던 두 [[구제전문학교]]인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舊대동공업전문학교)였다. 두 전문학교는 일제 강점기에 설립되었고 평양 도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평양공업전문학교는 보통문 인근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평양의 [[구제전문학교]]였던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를 각각 의과대학과 공과대학으로 삼아 종합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이 세워졌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시작은 했지만 학생과 교원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왜냐하면 북한에는 제대로 된 학위를 갖고 대학 강의를 할 정도의 소양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학 교육 자체를 이수할 수 있을 정도의 중등교육을 받은 학생도 상당히 부족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북한 지역에 대한 차별이 내려온 것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공계 분야의 [[조선인]] 박사 자체가 12명에 불과했으며, [[공업]]은 북한 지역이 오히려 남한 지역보다 발달하여 그렇게 못사는 것도 아니였다. 그 차별은 경제, 문화 분야에는 없고 정치적으로 비명문가라면 지역에 무관하게 누구나 당하던 것이, 외침과 늦은 영토 편입으로 명문가가 적은 북쪽이 심한 경향이 있던 것이었다. 구한말 정도 되면 더 변방인 [[함경도]] 출신 [[이용익]]도 조정의 총애를 받아 제도적으로 이미 지방 출신은 배제하던 명문가 위주의 출세 경향이 잦아드는 추세였다. 조선시대에도 이런 정치적 배제가 결과적으로 정치 대신 교육 기관을 차리게 하여 교육 여건을 좋게 만들었으며, 일제강점기 무렵에도 [[평안남도]] 지역은 초등교육 이수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았으며, [[경성제국대학]], 전문대학에 서북출신이나 평안도 출신의 비중이 많았다는 연구마저 존재한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187221|#]] 애초에 그 차별이라는 것도 전통적 명문가가 적어 [[승진]]이 어려운 것이었지, 과거 합격 자체는 많이 하는 등 교육열은 나쁘지 않았다. [[이광수(소설가)|이광수]], [[백석(시인)|백석]], [[석주명]] 같이 이름을 날리던 [[사람]]도 있어 인구 자체가 남한보다 희소하고 이념적 요소도 충족시킬 것을 요구해 인재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45년]] [[여름]] 기준으로 북한 지역 전체를 통틀어 대학 및 관공립 전문학교 졸업자는 30~40명에 불과했고, 이학(자연과학) 계통 조선인 교수는 평양공업전문학교에 단 3명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한다. 상기한 임시위원회가 [[소련]]의 대학에 유학을 보내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 것도 당장 국내에서는 쓸 인원이 없었던 문제 때문이었는데 그걸 간과하고 급하게 개교부터 하니 인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교원뿐 아니라 학생의 수와 질까지도 열악한 상황에서 결국 북한에선 당시 혼란에 빠져 있던 남한의 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을 포섭하거나 납치했고, [[한국전쟁]] 와중에는 별도 편성부대에 특명을 내려 학자들을 추적 납치해갔다고 한다. 이렇게 끌어모은 교원들이 초기 김일성종합대학 설립과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설립 작업의 초창기 직후부터 [[소련]]의 방침에 따라 김일성종합대학의 교직원들은 예외없이 러시아어 학습부터 시작해서 강도높은 소련식 재교육을 받고 핵심 교원들은 길든 짧든 현지 유학을 다녀와야 했다.[[https://www.newsis.com/view?id=NISX20200502_0001012218|#]] 참조. 북한 정권은 교수진 확충과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개교 직후인 9월 18일 1차로 299명의 학생을 선발해 소련 모스크바종합대학, 레닌그라드종합대학, 우랄종합공과대학 등에 유학생으로 파견했고, 1년 뒤인 1947년 8월 24일 2차로 105명의 대학생과 15명의 연구생(대학교수, 중등교원, 고급기술자) 역시 소련에 파견했다. 소련에 유학을 다녀온 인적 자원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의 근간을 구성했던 것이다. 당연히 김일성종합대학의 편제는 당시 [[모스크바 대학교]]를 본 따 소련식 학제로 철저하게 개편되었다.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9개 전문학교를 통합해서 서울대학교를 개교하는 과정에서 [[미군정]]의 '[[국대안]]'에 반발한 학자와 학생 일부가 [[월북]]하여 김일성대 설립에 참여했다. 그 결과 초창기 김일성대는 월북 인사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월북 인사들의 규모나 비율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과거의 [[https://shindonga.donga.com/Library/3/02/13/105191/4|자료]]들은 월북 인사들의 영향력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나, 2020년대 들어선 그러한 경향성이 자료의 완결성이나 낮은 접근 용이성 때문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해방 직후의 '경성대학', '서울대학'의 공식적인 교직원 및 재학생 명부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망실되었고, 당시 재직, 재학했던 이들의 증언을 종합해 자료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는데 교차검증 등 타당성을 갖춘 자료가 완성된 것은 2010년대 후반이다. 이러한 자료에 따르면, 학부마다 10~45%에 이르는 교직원이 자신 월북이나 납북 등으로 북한으로 이동한 것이 확인[* 특히, 이러한 인사 중엔 법문학부의 [[백남운]], 박극채, [[손진태]](납북), 의학부의 이정복(납북), 최응석, 최희영, 이공학부의 [[도상록]], [[전평수]], 여경구, [[이승기]] 등 이미 일제 강점기에 이름이 알려진 네임드급 학자들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된다. 결과적으로, 월북 인사들의 비율이 과반은 아니지만, 초기 북한의 고등교육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미군정기 서울대가 행정적으로 미국식 학제로 개편된 것은 맞지만 경성제대-경성대학으로 이어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인문대, 사회대, 자연대)과 의과대학은 실질적으로는 [[경성제국대학]]과 [[도쿄대학|도쿄제대]], [[교토대학|교토제대]] 등 [[제국대학]] 출신 교수들이 계속해서 과반수를 넘어 최대다수였던 데다가([[서울대학교/역사#s-3.1]] 항목 참조), 나머지 교수들도 미국 유학파는 없다시피하고 대부분 일본의 대학[* [[히토쓰바시대학]] 등 관공립대학 및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주오대학]], [[호세이대학]], [[메이지대학]] 등 사립대학]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일본식 교육이 그대로 이어졌다.[[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s-3.2.2|#]] 보다 못한 [[미국 정부]]가 대한(對韓) 원조의 일환으로 [[미네소타 대학교]]과 계약을 맺고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의학 공학 농학 행정학 등의 학문분야에서 서울대학교의 교수 및 조교들을 미네소타대학에 유학시켜 미국식 학문을 이식하는 '''미네소타 프로젝트'''를 실시했을 정도이다. 교육학술 내용이 일본식에서 미국식으로 변화되는 것은 1960~[[1970년대]]에 미국 유학파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부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오히려 [[소련공산당]]의 영도하에 중앙집권적으로 실시되었으며, 1940년대 후반부터 [[한국전쟁]] 기간에도 지속된 김일성종합대학의 '''소련화''''가 훨씬 빠르고 철저했다. [[숭실대학교]]와도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학교다.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당은 본래 평양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자진폐교했고 여기에 [[구제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그런데 사립 대동공업전문학교가 관립 평양공업전문학교로 개편되고 광복 이후 김일성대 공대가 되면서 이 평양 숭실대학 자리에 김일성대학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태극기]]가 게양된 적이 있다. 1950년 10월 18일 오후 5시, [[6.25 전쟁]]의 [[평양 탈환작전|평양 전투]]에서 북진한 [[대한민국 육군]] 소속 [[제7보병사단]] 8연대 9중대가 평양을 장악하고 가장 먼저 [[태극기]]를 게양한 곳이 바로 이곳 김일성대학이다. 한편 김일성종합대학은 [[순천시(북한)|순천시]] 자모산 인근으로 피신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가 1955년에야 지금의 캠퍼스로 이동했다.[[https://blog.naver.com/minjune98/222616472806|#]] [[6.25 전쟁]] 이후 대학이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고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자, 설립을 반대했던 이들은 친소련 대국주의자나 [[친미]] 끄나풀로 몰려 숙청을 당했다. 또한, 남한에서 월북한 [[지식인]]들의 상당수도 이용 가치가 사라지자 사상 검증을 받거나 [[숙청]]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