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자점 (문단 편집) === 출세한 군사 전문가 === 공신인 데다 실세들과 사이도 꽤 원만하여 순조롭게 출세가도를 달렸다. 순검사나 한성 판윤 같은 직책을 역임할 때 특유의 급하고 다혈질인 성격을 조정은 과단성 있고 강직하며 능력이 있다고 판단했지만, 인조는 그다지 김자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인조가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려고 하자, 김자점은 윤의립의 조카 윤인발이 역적인데 어찌 윤의립의 딸을 들이겠느냐며 반대했다.[* 윤인발은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이 점을 이용했다.] 결국 인조는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기를 포기했지만 김자점을 괘씸히 여겨 귀양보냈다. 그러나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사 적임자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다시 등용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적어도 1627년에 김자점은 특진관이자 어영대장으로서 어영청에서 어영군을 훈련시켰다. 즉, 자타공인 훈련도감 다음가는 조선 No.2 정예군이자 병자호란에서 활약하는 어영군은 김자점이 직접 선발하고 훈련시킨 병력이었던 셈. 1627년 정묘호란 당시 어전회의에 이귀가 "[[평산군|평산]], [[개성시/역사#조선시대|개성부]]의 백성들이 장차 살육을 당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인조에게 묻자 김자점이 그 백성들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이 어떻느냐고 진언을 올렸다. 인조는 "강화도로 데려왔다가는 장차 굶어 죽게 될 것이다." 하면서 오늘날의 급선무는 강에 있는 선박을 수습하여 경창의 쌀을 운송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정묘호란 때는 왕을 호종한 공으로 순검사(巡檢事) 겸 임진수어사(臨津守禦使)에 제수되었고 1628년 숭정대부(종1품)로 승진했다. 1630년 한성부 판윤, 이후 상의원 제조(尙衣院提調)와 겸 구관청 당상(句管廳堂上)이 되었다. 이 무렵 김자점은 [[조총]] 관련 군수물자 확보를 건의하고, 요역이 제대로 면제되지 않아 군사들이 견디지 못한다며 낱낱이 신칙하자고 건의했다. 1631년 김자점은 [[강화도]]의 성지와 군량을 구관하는 직임을 맡았는데, 백성의 생활이 한창 곤궁하고 또 저축된 것이 없어서 (강화도에 옮갈 백성들) 10만여 명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며 여러 대책을 주장했다. [[나주시|나주]], [[영광군|영광]] 등 고을을 강화도에 소속하여 등주, 동래와 통상하고 [[제주도|제주]]에서 채취한 미역과 각도의 어염세를 본총에 소속시키고 삼명일의 방물을 면포로 바꾸어 배 만드는 자본으로 삼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강화도 수비를 강화하는 데 필요한 재원 마련 방안을 말한 것이다. 이중에 미역과 어염세는 인조가 다시 의논하라고 했다. 김자점은 명나라의 가도(椵島), 등주(登州) 및 내주(萊州)와 통상(通商)한 다음에야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고, 인조는 명나라가 길을 통하지 않게 하는데 어떻게 하겠느냐고 반박했다. 김자점은 이때 (강화도의) 목장 등을 모두 [[둔전]]으로 개간하여 경작하면 틀림없이 곡식을 많이 얻으리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말을 먹여 기르는 지역에 쉽게 경작을 허락할 수는 없다고 거부했다.[* 김자점의 말은 인터넷 역사가들의 호도처럼 무능해서 한 말이 아니라, 어려운 상황 속에서 건의해봄직한 사안이었다. 인조 재위기간은 임진왜란 이후 재건 중이었기 때문에, 요즘 말로는 개간 열풍이 불었다. 과거 목장으로 쓰이던 서해, 남해 연안의 섬들은 땅이 기름져 농토로 개간하면 분명 좋은 효율을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 말기에는 도서 지역에 유생들까지 몰려들어 오늘날보다도 인구가 많았다.] 김자점은 당장 백성 10만을 먹여 살릴 의무를 맡았으므로 개간을, 인조는 전쟁터에서 중요하게 쓰일 기병 때문에 현상 유지를 주장한 것이다. 당시 김자점은 강화도에 곡식 10만 석을 들이고자 영리를 다투어 시상과 어민이 생업을 잃었다고 하는데, 이는 김자점이 강화도에 군량을 비축하고자 노력했다는 뜻이다. 인조 10년(1632)에는 산릉의 큰 역사로 백성들이 궁핍하다며 자신이 담당한 구관청의 포와 미를 내어 민력을 펴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또 김자점은 상방에 있으면서 여러 기물들을 정밀하게 다듬었다. [[1633년]] 조선군 [[도원수]](지금의 합참의장 정도) 자리에 올라 서북방의 방어 책임자가 되었다. 도원수 재직 중 한성부와 경기도 주변 지역에 성곽과 진, 보를 보수하였다. 과도한 격무에 시달린 김자점은 [[1633년]] 7월 상의원제조직과 구관청당상의 겸임에서 해임해줄 것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조 16년(1636) 청나라 병력이 움직이려 한다는 보고에 따라 대비할 목적으로 [[평안도]]로 파견되어 수비체계를 바꾸는 등 작업을 하였다. [[1635년]]에는 김자점이 몸소 돌을 져 날라 몇 개월 만에 백마산성을 수축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느 정도 가감할 필요야 있겠지만. 또한 1635년에 이르면 김자점이 의주에 설치한 둔전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의주의 둔전은 1634년에 6둔이지만 35년에는 12둔이 되었고 소출 2300석을 내었다. 지난해에는 2만 석이었는데 올해는 배가 되어 3, 4만 석을 수확할 수 있었고, 의주의 둔곡의 두해의 소출이 4만 5천 석에 쓰고 남은 게 3만 6천 석이라는 것도 있다. 김자점은 의주를 포기하잔 주장에도 반대하고, 백마산성을 지켜 초입의 저지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야사와는 달리 [[임경업]]과도 나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믿고 맡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