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자점 (문단 편집) === 권력의 정점에 서다 === 병자호란 이후, 조정은 친청과 반청으로 나뉘어 격렬한 정쟁 속에 빠져있었다. 인조는 이 상황에서 조정을 정리하고 군사전문가로 계속 활용하기 위해 김자점을 다시 기용했다. 도원수로서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강화 유수와 호위 대장을 역임하면서 인조의 측근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오히려 도원수로서의 실패 때문에 계속 중용했을 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큰 약점이 생겨버린 탓에 인조의 총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했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천 최명길]]이 병자호란 이후인 인조 17년인 1639년에 어영군을 김자점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걸 보면 여전히 실무능력도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서는 김자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인조는 이를 철저히 묵살했다. 이후 서인이 공서와 청서로 나뉘자 김류, 이시백, 원두표, 이시방, 최명길, 심기원 등을 비롯한 공서파 편에 서서 청서파를 탄압했지만 이후 공서에서도 원두표, 민광훈 등이 원당을 구성해서 나가자 원당 역시 탄압했다. 이후 김류와 손을 잡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다. 김자점의 반대편에 있던 최명길의 라인에 있으면서 당시 실세인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심기원은 인조의 무능함에 실망해서 원래는 [[소현세자]]를 왕으로 옹립하고 인조를 상왕으로 물러나게 할 작정이었으나 소현세자는 큰 일을 도모할 사람이 아니었는지 왕족인 [[회은군]]을 추대하자는 모의를 했지만, 거사 직전에 고변자가 튀어나와서 결국에는 이 사건으로 심기원은 가산이 몰수당하고 능지처참당해 죽는다. 심기원의 부하인 채문형과 권억도 연루되어 같이 처형된다. 심기원은 왜 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승할 세자를 굳이 인조를 상왕으로까지 만들면서 추대하려고 그랬는지는 확실치 않다. 심기원은 인조의 정치에 실망해서 역모를 일으켰다는 것이고, 이후로 인조는 세자에 큰 실망을 하게 되면서 사망 이후에 세자의 아들보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임명했다는 것, 그리고 김자점이 이를 찬성한 것과 세자 일가를 싫어하는 인조가 [[민회빈 강씨]]에게 왕실에 저주했다는 누명을 씌웠다는 것에 영합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심기원은 이괄의 난 때 이괄이 왕으로 추대한 [[흥안군]]을 멋대로 교수형에 처한 것 때문에 인조한테 밉보여 있었던 점이 큰 원인으로 보고 있다. [[임경업]]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서 조사를 받다가 고문으로 인해 옥사했는데, 김자점은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쫓기던 임경업을 명나라로 도피하는 것을 도왔었고 임경업이 친국 도중에 이를 발설할까봐 자신의 안전을 위해 사전에 임경업을 죽게 했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다만 실제 정황을 보면 김자점이 임경업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사실이나, 인조는 임경업의 해명을 듣고 '심기원이 먼저 반역을 일으키고 사후에 임경업을 끌어들이려 한 것 아닌가?'라고 추측하며 임경업에 대한 처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신하들과 토론하던 도중 임경업이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즉 의도적인 고문사가 아니라 단순히 임경업이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옥사의 형태이다. 어쨌거나 이 일로 인해 최명길이 물러나고 김자점이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이후의 행보를 보면 인조가 왜 김자점에게 힘을 실어줬는지 알 수 있는데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가 갑작스럽게 알수 없는 병으로 승하한 후, 그의 가계(원손을 죽이고)를 배제시키고 효종의 승계를 확정 짓는 전위대 노릇을 했다. [[민회빈 강씨]]가 인조 독살과 왕실 저주라는 누명을 쓰고 역모 혐의를 받게 되자 앞장서서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주장해 결국 관철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또 김자점은 자신의 뒷배를 봐주던 세력이 돌아서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바로 그 당시 영의정 [[김류]]가 민회빈 강씨의 사사를 반대하자 인조는 이에 분노했는데, 이때 좌의정이던 김자점은 강빈 사사를 찬성하는 입장이어서 인조의 뜻에 찬동하여 [[김류]]마저도 배신을 했다. 이후 김자점은 김류를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영의정 자리를 장악했으며 이후 김자점은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해 나간다. 또한 자신의 손자인 세룡을 인조와 [[소용 조씨]]의 딸인 [[효명옹주]]와 혼인 시켜 인조와 더욱 밀착하여 권세를 누리게 된다. 인조가 죽기 전에 "김자점과 [[이시백]]은 나와 같이 대하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