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자점 (문단 편집) === 몰락과 비참한 최후 === 인조 사후 김자점은 인조의 정치에 반발하는 소위 산림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그 이유는 김자점이 병자호란 당시 도원수로서 패전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후 청나라에서 파견된 [[정명수]](鄭命壽)를 위시한 역관 무리와 결탁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 종법을 무시한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민회빈 강씨를 제거하고 소현세자의 세 아들을 유배보내는 데 일조했다는 이유로 김자점에 대한 여론은 좋지 않았다. 인조가 승하한 지 6일 만에 대간은 인조의 은혜를 저버리고 대신으로서 사익을 추구하고 방종하다는 이유로 김자점의 파직을 요구했다. 김자점을 파직해야 한다는 대간의 주장에 대해 효종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효종]]은 표면적으로 김자점이 인조의 공신이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그를 두둔하는 한편, 탄핵 논의를 제기한 대간을 교체하기도 하였다.[* 사실상 조정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 당시 여론에 따라 김자점을 처분한다면, 정국 운영의 활로를 열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김자점이 효종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된 강빈의 옥사에 깊숙이 개입했던 만큼, 섣불리 김자점을 처분했다가 혹여 강빈의 옥사가 재조명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최기준. "孝宗初 金自點 제거 과정과 효종의 정통성 문제." 한국문화연구 43 (2022), pp.81~83.] 효종의 미온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을 파직하라는 여론은 오히려 격렬해졌다. 이에 효종은 한 달 여 만에 '김자점이 죄는 없지만, 부득이 공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김자점을 파직했다. 김자점의 파직을 얻어낸 대간은 수위를 올려 김자점의 관작을 삭탈하고 유배 보낼 것을 청했다. 효종은 선왕의 공신인 김자점에 대한 추가 처분은 없다며 대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1649년 11월에 이르러 대간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공론에 의거해 김자점의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문외출송시켰다. 대간은 문외출송의 처분은 김자점의 죄과에 비해 부족하다면서 거듭 유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던 와중에 1650년 3월, 청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효종과 조선 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세간에서는 김자점이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자 효종이 [[김상헌(조선)|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을 모의하고, [[송시열]]이 쓴 [[장릉(파주)|장릉]](인조의 능) 지문에 청나라 연호가 아닌 [[명나라]] 연호를 썼다는 일을 밀고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효종은 김자점을 강원도 [[홍천]] 땅에 중도부처했다. 그 후 김자점의 두 아들까지 외직으로 내보내려 했는데, 영의정 이경석은 증거도 없이 소문만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효종은 김자점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라면서 김자점의 두 아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냈다.[[https://sillok.history.go.kr/id/kqa_10103004_005|#]] 하지만, 세간의 소문과 달리 청나라 사신은 김자점 구명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청나라가 사신을 보낸 궁극적인 목적은 당시 섭정왕이었던 [[도르곤]]과 [[의순공주|조선 왕실 여인]]의 혼사를 주선하기 위함이었다. 청나라 사신은 한양에 입성하기 전 조선이 양궁의 혼사를 수용하겠다는 뜻을 비추자 조선의 편의를 봐주는 방향으로 조사를 마무리 했다. 심지어 김자점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사도 없이 비리 문제로 김자점을 파직했다는 조선 조정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했다. 청나라에서 김자점 문제를 건드린 것은 양국 간의 혼사를 추진하기 위한 구실이었음이 드러났지만,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김자점은 청나라를 이용해 국가를 전복하려 한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청나라 사신이 귀국한 후 김자점을 절도안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김자점은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김자점이 전라도 광양 땅에 옮겨진 지 1년 여가 지난 1651년에 김자점의 사돈인 [[소용 조씨|귀인 조씨]]의 저주사건이 일어났다. 소용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하려 했다는 혐의로 옥사가 시작되었고 관련자들이 속속 붙잡혀 왔다. 그러던 중 추국청에서 소용 조씨의 종형인 조인필(趙仁弼)을 압송하려 하면서 저주 사건의 불똥이 김자점에게 튀었다. 조인필의 압송이 결정된 후 진사 신호(申壕)와 해원부령 이영(李暎)이 효종에게 김자점과 그 아들이 모반을 꾀했다는 고변을 올렸다. 신호와 이영은 조인필의 사위로, 이들이 고변한 이유는 자신들에게 화가 미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고변 내용에 따르면, 김자점이 문외출송당한 이후 그 아들 김식(金鉽)이 무관들과 함께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모의했다는 것이었다. 이후 관련자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면서 김자점과 두 아들 김식과 김련(金鍊), 손자 김세룡(金世龍) 등이 [[소용 조씨|귀인 조씨]]와 결탁해 왕실을 저주하고 역모를 계획했다는 진술이 나왔다.[* 구체적인 역모 내용은 진술자마다 크게 달랐다. 혹자는 소용조씨의 큰 아들인 [[숭선군]]을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지만, 혹자는 조씨가 숭선군을 미워했다라고 진술했다. 또다른 혹자는 숭선군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김식 혹은 김세룡을 옹립하려 했다고 진술했다.] 효종이 김자점의 아들 김련과 김식을 친국(親局)하여 공모자들을 밝혀내 여러 무장들이 희생되었고, 김자점은 결국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되었다.[* 일부에서 사지를 먼저 잘랐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런 기록이 없다.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에 나온 걸 보고 적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기록상으로는 규정대로 처형되었다고 적혀 있다. 다만 연려실기술에서 [[심기원]]을 죽일 때 김자점이 처형 담당자에게 '심기원의 팔다리를 먼저 자른 뒤 목을 베라'고 했고 그 말을 전해들은 심기원이 '너도 똑같이 죽을 거다'라고 저주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얘기는 나온다. 아마 그 얘기가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반역죄로 처형된 만큼 김자점의 시신은 사방에 조리돌림을 당했어야 했다. 하지만, 효종은 대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자점이 선왕의 공신이었다는 이유로 그 시신을 조리돌림 하지 말고 바로 수습하도록 하였다.] 가족들 역시 무사하지 못해 아들 김식, 김정(金鋌)과[* 다른 아들인 김련은 국문 도중에 물고.] 손자 김세룡, 김세창은 처형되고 소용 조씨도 자진을 명령받아 목숨을 잃었으며, 조씨의 딸이자 김자점의 손주 며느리 [[효명옹주]]는 섬으로 유배를 떠났다. 김자점의 어머니와 아내, 첩들, 며느리들은 전부 노비로 전락했다. 김자점의 아버지 김탁의 묘소와 그의 선산에 있던 가문의 묘소들도 전부 파 헤쳐져 부관참시당하는 말로를 맞는다. 김자점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라,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파직되고 도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모두 쫓겨났다. 다만 김자점의 아들과는 별도로 김자점의 역모는 조작이라는 지적도 일부 있지만, 설령 저게 조작이라고 해도 이미 아들이 역모를 꾸민 것 자체가 사실이라 [[연좌제]]를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 권력 추구, 궁중과 파행적인 유착 관계, 매국 행위, 역적질 등 당시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조대 이후로 오랜 세월을 두고 간신으로 후세에 엄청난 비판을 들으며 역적으로 낙인찍혔다. 김자점의 [[방계]] 후손이 [[김구]]다.[* 정확히는 김자점과 14대촌 먼 일가의 후손이다. 친형제나 사촌형제의 후손이면 당연히 방계 후손 대접을 받지만, 무려 14대촌이나 되면 사실상 남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김구의 직계 조상이 해주로 피신하고 양반 신분을 숨겼던 점과, 집안 어른이 청년 양반에게 하대받는 처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자점으로 인해 생긴 후폭풍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백범일지에 '아주 상놈의 패를 차게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김자점 역모 사건으로 인한 가문의 몰락이었다.] 그나마 중국과 달리 당사자 및 16세 이상 남성만 사형에 처하는 조선의 연좌제에 따라 직계는 [[노비]], 나머지는 그냥 [[서민]]으로 강등하는 선에서 끝났다. 물론 역적의 일가가 한성에서 살기는 불가능했으므로 김자점의 남은 일가는 황해도 [[해주]]로 이주[* 해주로 온 것은 평범한 이주가 아니라 거의 야반도주하듯이 역적으로 쫓겨 도망쳐 온 셈이다.]했는데 김구가 태어날 때쯤엔 완전 몰락했다. 김자점의 죽음을 두고 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은 효종이 김자점에게 '너는 내 형님의 원수니 귀양 가라.' 했다는데 헛소리다. 효종은 소현세자 부부와 친하긴 했어도 정통성 문제에 민감했기 때문에,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형수 [[민회빈 강씨]]를 역강(역적 강씨)이라 부르고, 강씨를 입에 올리는 자는 엄벌에 처하리라 경고할 정도로 매우 강경하게 나갔다. 공교롭게도 김자점이 제거된 직후 강빈의 옥사를 재조사하고 나아가 민회빈 강씨를 신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을 정도였다. 즉, 효종이 김자점을 제거한 이유는 김자점이 매국행위를 했고 장차 자신의 권위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