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정덕 (문단 편집) == 이력 == [[전라북도]] [[이리시|이리]] 출신, [[서울특별시]] [[강남구]] [[청담동]] 소재 [[영동고등학교(서울)|영동고등학교]]에 [[국어교사]], [[중국어]] [[교사]]로 재직했다가 정년퇴임했다고 한다. 김정덕 '''선생님'''인 이유가 '''[[이왜진|진짜]] [[고등학교]] [[선생님]]'''이어서였다. 귀암의 수업을 들었던 한 갤러의 증언에 따르면, [[공주사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젊은 나이에 [[학생군사교육단|ROTC]] 8기('''1970년 임관''') 출신 공병 장교로서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역사왜곡|참여했다고 한다.]]'''[* 귀암의 생년이 1947년이 맞다면 1961년에는 중학생이었을 때다. [[공병]]장교, 그것도 [[불도저]]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새마을운동]] 등으로 일어난 국가단위의 [[개발]][[산업]]에 참여한 [[경력]][[뻥튀기|을 부풀리고]] [[과장|살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학군사관]] 출신 장교는 1기가 1963년 임관'''이므로 절대로 [[5.16 군사정변]]에 참여할 수 없다.] 수업 중에 자신을 [[예수]][* 정확히는 항상 예수를 '''지져스 크라이스트'''라고 불렀다. 예수라고 말한 적은 드물었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또는 [[무함마드]]. 세계 6대 성인들을 얘기할 때 예수와 석가모니, 공자는 늘 고정멘트였으나 소크라테스와 무함마드(귀암은 잘못된 표기인 마호메트라 말하였다.)는 수업 때마다 달리 말하였다. 어쩔 때는 세계 7대 성인이라며 둘 다 말한 적도 있었고.]에 이어 [[덕]]을 가르친 '세계 5대 성인'으로 칭한다고 한다. [[한국어|국어]]뿐만 아니라 [[영어]]와 중국어를 포함한 5개국어(본인이 주장한 5개국어 + C언어)에 능하다고 하며[* 의외의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컴퓨터 실력은 귀암의 나이를 감안하면, 당시 귀암의 또래 연령층들이 [[컴맹]]이 많았을 시절을 감안하면 꽤 훌륭했다. 이따금 [[컴퓨터공학과]] 졸업반 학생이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퀄리티의, 또는 초짜 [[프로그래머]]의 프로그램들을 뛰어넘는 프로그램/툴을 제작할 정도로 [[프로그래밍]] 실력이 있었다. 당장 [[디시인사이드 지우개]]의 초창기 프로그램도 이 분이 만들었다고 한다. 프로그래밍에 제대로 마음먹고 배웠으면 꽤 실력있는 제작자가 되었을지도?], 이따금 시를 낭송하거나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영동고 동문들중 귀암에게 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에 증언에 따르면 중국어 실력은 [[초등학생]] 수준이라고 한다.[* 그가 개인 홈페이지 프로필에 적어놓은 중국어 [[명언]]을 해석한 글귀인 '넘어지고 거꾸러져도 다시 일어나라'라는 말은 해석이 거창할 뿐 중국어 원문은 '넘어지면 일어나라'라는 단순한 뜻이다.][* 근데 이와 별개로 또 중국어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는 졸업생들의 의견도 있는 것을 봐선 초등학생 수준이란 건 [[중국인]] 초등학생 수준으로 봤을 가능성이 높다. 영어의 경우 잘 봐줘야 아무래도 장교 출신답게 '그냥 적당히 좀 하는 수준' 정도인 중급 실력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중국어 실력은 자타 공인 실력자라는 평이 꽤 많았다.][* 그런데 사실은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생활에서 접하기도 쉽지 않고, 반공 기조 때문에 대만과 수교한 기간이 길었고 생각보다 중국과 정식 수교한 역사는 길지 않다. 그전에는 표준어와 거리가 먼 광동화로 된 홍콩 영화가 한국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중국의 전부였다. 중국어 교육 붐도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중국을 배우자'라는 움직임 때문에 일시적으로 늘었는데 당시 학생들은 그 이전 세대들이니 중국어를 배운 전공자나 실력자가 있을 리는 없을테고 귀암의 생전 중국어 노래 영상이나 상술한 초등학생 작문 수준의 중국어 어휘력을 봐도 비전문가가 보기에는 그럴듯해 보지만 세세히 파고 들면 잘한다고 보기는 힘든 수준이 명확하다.] 매 학기 수업이 끝나면 본인이 부른 노래를 [[녹음]]한 음악 [[CD]][* [[1990년대]] 후반 이전에는 [[디스켓]] 또는 [[카세트테이프]]로 주었다.]를 학생들에게 배포했다고 한다. 키는 좀 작아서 그냥 평범한 사이즈의 [[넥타이]]를 매어도 그게 벨트 밑까지 닿았다고 한다. 그래도 [[큰 머리|비율이 좋지가 않아서 그렇지]] [[장교]] 출신이니만큼 160cm는 넘었을 것이다.[* 대략 눈대중으로 160~162cm정도는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장교출신이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형이 [[영 좋지 않다|영 좋다고 보긴 어려워서]], 이 분이 재직 당시 대다수 [[신입생]]들이 입학식에서 [[첫인상]]에서 평하길 웬 땅딸보가 있나라는 반응과 비웃음이 태반이었다.] 전공은 국어선생인데 정작 학교에서 중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가르친 건 절대로 '''시험에 안 내는''' [[기행]]에 빡친 [[학부모]]와 학교가 내쫓으려 했는데 [[단식투쟁]]해서 학교에 남았다는 전설이 있다. 왜 전설이냐면 단식투쟁 중 수위실에 숨어서 짜장면 시켜먹다 걸려서. 어느 사립고에나 하나 둘씩은 있는 괴팍한 선생이었던 듯. 학교 측에서는 늙은 교사를 함부로 내쫓을 수가 없어서 [[버로우]]. 거기다 영동고를 세운 창립자와 깊은 [[인연]]이 있어서 함부로 내쫓기도 힘들어서, 할 수 없이 재단 측에서 중요 교과목과 관련 없는 과목을 억지로 만들어내서 맡겼다고 한다. 그나마 귀암이 중국어를 할 줄 알았던고로 아예 주요과목인 국어에서 제2외국어인 중국어로 내쫓은 것.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308&docId=61370218&qb=7JiI65607J20IOyNhQ==&enc=utf8%A1%D7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RxWRoF5Y7uZssv7g6ARsssssstZ-427889&sid=UxtUonJvLCEAADLTH5A|네이버 지식인에 올라온 교사 시절의 귀암.]] 그리고 교사로서는 [[2009년]] 1학기까지 마치고 8월에 정년퇴임했다.[* 웃대에 올라온 글을 토대로 수정. 애초에 47년생인 귀암 선생의 정년은 만 62세인데, 2012년까지 근무한다면 정년을 넘겨서도 근무한 것이 된다. 비록 설립자와 인연이 있었다고는 해도 학교 측이 귀암 선생의 명성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정년만 보장해주고 퇴직시켰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정년퇴임 후에는 [[신학]]을 배운 뒤 목회자가 되어 종교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나 그 목회자 활동 역시 신학을 배운 기간을 제외하면 길지는 않다. [[2015년]]이 시작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이다. 영동고등학교 댄스동아리 '스톰'의 개설자이기도 하다. 처음 동아리 개설 전 3학년 학생들이 타 학교와는 달리 영동고에 변변한 댄스동아리가 없으니 댄스동아리를 만들어달라고 단체로 졸랐는데, 그중 [[지나가던]] 김정덕 선생님께서 좋은 생각이라며 학교 측에 동아리 개설을 승인시켜달라 요청,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높으신 분의 인맥으로 들어온 인물인 만큼 학교 내에서 하는 일에 비해서 위상은 높은 편이었을 것이다. [[운전면허]]가 없어서 출퇴근용 교통수단으로 주로 [[택시]]를 타고 다녔다고 하며, 한 달에 무려 55만원 넘게 택시비 지출액이 나왔다고 한다. 타계 전까지 그가 살았던 거주지는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용인)|신봉동]](당시 수지읍 신리)이었는데, 영동고에서 이 거리는 현재 택시 기본요금으로 편도만 대략 3만원 정도나온다. 귀암이 재직중일 당시 서울시와 경기도의 택시 기본요금을 감안하면(1600원~2400원 정도. 물가상승률도 포함해서) 한번 출퇴근할 때마다 왕복 4~5만원 정도 나왔던 셈이다.[* 물론 수지구에서 강남구까지 올라오는 버스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귀암 선생은 택시만을 고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