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정익 (문단 편집) == [[3.1 운동]] 시위 주동자 김정익 == ||<-2> || || 성명 ||김정익(金正翼) || || 생몰 ||[[1891년]] ~ [[1938년]]? || || [[출생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 오대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김정익(金正翼)은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며, 1891년 생이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그는 [[손영학]]·김정연(金正演)·[[장두희(독립운동가)|장두희]](張斗熙) 등과 협의해 3월 21일 길안면 천지 장날을 거사일자로 정하고 준비했다. 이윽고 3월 21일 아침 미리 제작해둔 태극기를 가지고 장터에 나가 광목을 사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만들고 시위 군중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오후 5시경 4백여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천지 장터의 중앙 부근에 독립기와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이후 오후 6시경 4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길안면 면사무소로 달려가서 면장, 면서기들에게도 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이때 주재소 경찰이 들어가는 걸 저지하자, 그는 시위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과 창문 등을 파괴한 뒤 장터로 돌아가 시위를 계속했다. 그는 주재소 습격을 계획하고 오후 9시경 5백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주재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 경찰이 발포하자, 결국 시위 군중은 해산했다. 이후 김정익은 일제 경찰의 검거를 피해 손영학, 김정연과 함께 피신했지만 1920년 2월 11일 의성읍의 박재하(朴在夏) 자택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합류하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려다가 일본 경찰이 급습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그 후 1920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석방된 후엔 조용히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1938년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정익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명이인/ㄱ]][[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건국훈장 애국장]] [[분류:건국훈장 독립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