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조순 (문단 편집) == 평가 ==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순원왕후|명경왕비]](明敬王妃)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조(조선)|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왕후(조선 영조)|정순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 >[[http://sillok.history.go.kr/id/kwa_13204003_001|1832년 순조 3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대[[정치]]가의 현손자이자 젊어서 [[과거 제도|과거]] 급제를 했고 [[외모]]나 [[능력]]도 출중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고 시작하고 있다. 재간택을 받기 직전이 조금 순탄치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국구가 된 시점부터 [[사위]]이자 왕인 [[순조]]뿐 아니라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졸기는 기록한다. 외적인 존경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 중대사를 총찰해 모두 주물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권신]] 중의 권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격이 지나치게 좋다면서 [[인간관계]]가 얕고 넓었다는 기록은 그에게 줄을 대는 자가 많았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적을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었던 모양으로 [[외척]]으로서의 선을 지켰을 수도 있고[* 정조 재위 기간의 [[김귀주]], [[정후겸]], [[홍국영]] 등 부류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소극적인 태도의 소유자로 순상(우유부단)했다는 평이다. 겉으로는 우유부단함이라고 가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자신의 딸 [[순원왕후]]에 대한 평가처럼 무사안일한 유형의 국정을 선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일에 먼저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호박씨 까듯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명예욕이라던지 하는 부문에 욕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종합적으로 정중동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평인데 같은 기사에서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