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서(가수) (문단 편집) == 평가 == 김종서는 1980년대 중반부터 가수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 실력이나 명성으로도 1980-90년대 한국 락계에서 대표적인 보컬 중 한명이었고, 92년 솔로 활동 시작 이후 1990년대 중후반까진 대중적인 인기 면에서도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특히 국내 [[락발라드]]씬에 많은 영향을 줬다. [[탑골공원|파고다]]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록 보컬 리스트로서 거의 유일하게 장르 안에 머무르면서 성공했기 때문. 솔로 시절 락발라드곡으로 차트 1위를 여러 번 만들어내며 항상 대표적인 락커 중 한 명으로의 무게감이 있었다. 90년대 초중반 한국에서의 록의 기준이나 표준은 김종서, 댄스락 또는 틴락으로 대표되는 서태지 등이 이끌어나가고 있었다.[* [[서태지]]랑 [[시나위(밴드)|시나위]] 시절 인연으로 친했기에 김종서가 [[서태지와 아이들]] 피쳐링이나 서태지의 보컬 트레이너를 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서태지의 창법엔 김종서와 비슷한 느낌이 어느정도 느껴진다.] 락 발라드 장르에서 김종서의 공헌은 절대적이었다. '대답 없는 너',[* 록발라드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친 일종의 모델 같은 노래기도 하다. 사실상 1990년에 발표된 겨울비 시나위 버전이 더 본래적인 록 발라드에 속하지만 히트는 대답 없는 너보다 늦게 히트했다.] '지금은 알 수 없어', '겨울비' 이 3곡이 연속적으로 히트하며 사실상 이후 등장하는 [[김경호]]나 [[박완규]][* 부활 시절만 해도 론리나잇, 마술사 등 신나는 곡 위주로 불렀고, 락발라드는 솔로 데뷔하면서 천년의 사랑처럼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한다.], [[김정민(1968)|김정민]], [[김민종]] 등 많은 락발라더들이 이 커리어를 모방했다. 게다가 그 후에도 '다시 난 사는 거야', '에필로그', '영원', '절대사랑'처럼 1990년대 중후반까지 발표된 곡들이 좋은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무대에서 장발을 휘날리며 멋있게 노래하는 모습은 당대 패션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줬다. 이 시기 날카로운 고음, 장발, 락발라드 이미지가 겹쳤던 [[김경호]]와 라이벌 플래그가 세워지기도 했다.[* 실제로 김경호가 남부러울 것 없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당시에 듣던 말 중 제일 달콤했던 말이 김종서와 비견된다는 말이었다고 한다. 비교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계신 분이다, 그런 분과 비교되는 것 자체가 스스로 건방져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라며 존경심을 표했다. 사실 김종서는 대중적인 성공 이전에 이미 시나위 시절 커리어만으로도 수많은 락 지망생들에게 전설로 자리잡았다.] 대중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락발라드 장르의 가수가 얼마 없는데 그 중에서 김종서와 김경호는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비교가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일단 성도 같은 김씨기도 하고~~ 하지만 김경호가 뜨기 시작했을 땐 김종서는 이미 전성기가 꺾이면서 록발라드를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던 시기였다. 창법도 날카로운 샤우팅에서 이미 많이 상해버린 보컬로 절제된 느낌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음색 역시 김경호는 날카롭고 꽂히는 고음을 선사하는 김종서에 비해 좀 더 화려하고 어떻게 보면 과장되게 극적으로 구사하는 편이다.[* 사실 김종서 특유의 앵앵거리는 창법이 호불호가 있긴 했다.] 스트레이트 장발[* 김종서 이전엔 록커들이 머리카락을 기르더라도 생머리가 아니라 퍼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김종서 본인도 커리어 초반엔 퍼머를 했었다.]이나 신비주의 컨셉도 그렇고 김경호는 김종서에게 상당히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세대차이부터 당시 추구하던 음악이나 창법의 차이까지 해서 서로가 라이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김종서가 구축한 락 장르의 대중화를 [[김경호]] 등의 가수가 이어받아 풍부하게 했다고 보는 게 바람직하다. 창법적인 면에서 말하자면 1980년대 초고음을 난사하며 헤비메탈의 샤우팅 창법이 주를 이뤘던 것과 달리 1990년대는 1980년대 이후 다소 상한 목으로 절제되면서도 여전히 시원시원한 느낌으로 활동했다. '''플라스틱 신드롬''' 같은 곡이 김종서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발라드 곡에서도 김종서 특유의 시원한 느낌이 있었다. 자신의 음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시나위와 함께 공연을 했으며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자신의 뿌리를 지켜나가기 위해 애썼다. 최정상급의 실력을 지닌 굴지의 보컬리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유독 저평가되는 뮤지션 중 하난데, 보컬 능력이 최정점이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지상파 방송보다는 주로 언더에서 활동했었기 때문이다. 인기 면에서 전성기를 맞이한 1992년부터는 솔로로 전향해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미 나이로는 28이었고 보컬기량도 1980년대에 비해 비교적 떨어진 상태였다.[* 한 방송에 나와서 얘기하길 김종서는 부활 초기 멤버 시절에 김태원과 갈등을 빚었던 가장 큰 이유가 지각을 많이 해서였는데, 교통비도 없어서 편도 2시간 왕복 4시간 길을 걷다 뛰다 보니까 지각이 잦았고 리더인 김태원에게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하루 한 끼 정도 먹는 생활이라 어쩌다 돈이 생겨도 교통비보다는 먹는 거에 더 썼고 담배는 정류장에서 장초를 획득해서 피웠다고 한다. 1980년대 초중반에 언더 생활을 시작해서 1992년에야 히트가수가 됐으니 고생을 오래 했을 것이고, 목관리를 비롯해서 건강이 좋았을 수가 없다. 해당 방송에서 가난했을 시절에 못 먹어서 피부병이 났다고 말하기도 했고. 1987년 시나위 2집으로 그나마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린 후에도 저런 극빈층 생활을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나아졌다고 해도 썩 넉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기에 실제로 목에 문제가 있어 의사가 1995년 겨울부터는 노래부르지 말고 쉴 것을 강권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속사와 김종서 본인은 스케줄을 강행했고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라이브에서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다. 이후 김종서 본인의 목상태가 1990년대 중후반부터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이다 00년대에 들어서 눈에 뜨일 정도로 성량도 떨어지고 비음이 강해지고 음정도 불안해진다. 또한 김종서의 전성기 시절 음색과 창법이 한국보다는 북미의 헤비메탈 팬들이 좋아할법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당시 김종서의 목소리는 1980년대를 풍미한 글램 메탈 밴드 [[머틀리 크루]]의 보컬 빈스 닐의 스타일과 흡사했다. 날카롭고 거칠면서 얇은 음색과 정돈되지 않은 직선적인 창법 등이 트레이드 마크다.], [[스콜피온즈]]의 [[클라우스 마이네]]처럼 고음 발라드 넘버에 잘 어울리는 서정적인 미성 보컬을 선호하는 한국 대중들의 취향과 맞지 않은 부분도 크다. 인터넷에서는 헤비메탈에서부터 록발라드까지 일세를 풍미하던 김종서 전성기의 카리스마를 잘 모른 채, 기량이 많이 떨어진 김종서의 모습을 전부라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다수이기 때문에 간혹 저평가하는 이들도 있곤 하다. 또한 [[나는 가수다]] 등으로 성공적인 복귀를 해낸 가수들의 새로운 팬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을 추켜세우기 위해 비교하고 깎아내리고는 하지만, 사실 김종서의 커리어는 록보컬로서는 최고점에 있다. 선술되었듯이 헤비메탈에서부터 록발라드까지, 보컬로서의 기량과 앨범이라는 작업물의 퀄리티까지 통틀어 일세를 풍미한 보컬은 한국에 거의 없다. '''즉 작품과 대중성을 다 거머쥔 록보컬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따져본다면 김종서는 보컬 역량과 더불어 작사, 작곡, 편곡 능력 면에서 1980-90년대에 괄목할 만한 가시적인 성과를 냈다. 당시 언론은 '한국 록계의 최고', '락의 전설'이라고 자주 지칭하기도 할 정도였다. 그나마 90년대 중후반은 후배 [[김경호]]가 치고 올라왔지만, 김경호는 사실 김종서가 가지고 있는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서로서의 자질은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 대중성 까지 겸비한 김종서 같은 인물은 이 씬에선 찾아보기 힘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