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종태(1958) (문단 편집) ==== 광주, 광주, 광주 ==== 군인이었지만 방위였기 때문에 김종태는 계속 주민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1980년 6월 1일, 주민교회에 특별한 자리가 마련되었다. 5.18을 겪고 광주를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자리였는데, 김종태 또한 거기 있었다. 강단에 선 사람은 동화작가 윤기현으로 농민운동을 하던 중 광주에서 5.18을 겪었었다. 그가 광주의 참상을 말하자 주민교회의 교인들은 울었다. 헌데 김종태는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따졌다. 이에 윤기현은 그에게 직접 광주로 가보라고 말했다. 김종태는 곧 광주로 향했고,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다시 성남으로 돌아왔다. 진실을 안 김종태는 사람들에게 5.18의 진실을 알리는 전단지를 만들어 뿌리고 다녔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매일 직접 유인물을 만들고 밤을 새워가며 등사하여 5.18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도 안 들어줬다고 한다. 1980년 6월 9일[* 이 날은 그가 제대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그 날도 그는 열심히 유인물을 행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형사가 나타나 그를 뒤쫓아왔다. 그러자 김종태는 유인물을 한꺼번에 뿌리고는 [[분신|미리 준비한 석유를 뒤집어쓰고는 불을 당겼다.]]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 >'''노동삼권 보장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이 상황을 목격한 어느 [[약사]]가 소화기로 불을 꺼주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지 오래였다. 김종태는 지나가던 트럭에 실려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5일만에 숨을 거뒀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영원한 노동자 김종태님은 성남에서 일한 노동운동가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위해 <형제단>을 만든 예수의 제자 5·18광주학살에 분노“광주시민의 넋을 위로하며”라는 성명서 를 발표하고 80년 6월 9일 신촌네거리에서 분신 92년 5월 광주 5월 시민상 수상 광주의 정신과 하나가 되어 여기 묻히다. - 망월동에 묻힌 김종태의 묘비에 새겨진 [[http://cyber.518.org/sub.php?PID=01|글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