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좌진 (문단 편집) == 생애 == 1889년 12월 16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 金衡圭, 1864 ~ 1892. 3. 11][* 족보명 김명균(金銘均).]와 어머니 [[한산 이씨]] 이상희[* 1863년생으로 1949년 8월 30일에 사망했다.][* 이윤직(李潤稙)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형 김경진[* 金景鎭, 1883. 2. 8 ~ 1963. 5. 13]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덕규(金德圭, 1848. 8. 19 ~ 1900. 11. 1)[* 초명 김덕균(金德均).]에게 [[양자(가족)|양자]]로 가면서[* [[순조]]의 [[사위]] 동녕위(東寧尉) [[http://people.aks.ac.kr/front/dirSer/ppl/pplView.aks?pplId=PPL_6JOc_A1810_1_0030658|김현근]](金賢根, 1810. 12. 12 ~ 1868. 8. 25)의 양증손자로 입적했다. 그의 [[가문]]의 위상을 알 수 있는 대목.] 집안의 차남인 김좌진 자신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정환덕]]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은 당시 [[헤이그 특사]]단을 수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나, 무슨 일인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에 위치한 [[갈산중학교(충남)|갈산중학교]] 및 갈산고등학교의 자리가 호명학교의 자리였고 당시 90여 칸이나 되는 김좌진의 자택을 학교로 사용하였다.]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 1911년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에 거주하던 9촌 지간의 삼종증조부(三從曾祖父) 김종근(金宗根, 1844. 5. 17 ~ 1925. 12. 18)을 방문했다가, 이미 [[변절]]하여 일본 경찰과 내통한 김종근의 [[뒤통수]]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거주하였다가, 본디 다른 뜻을 품어 항시 조국 [[독립]]의 마음이 있던 그는 1918년 [[만주]]에 [[망명]]해 [[의병]]을 일으켜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을 맡았다. 대한광복회 와해 후[* 이 사이 1918년 10월 22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궐석 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공갈]] 혐의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117&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34016&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받은 바 있다]].] 북[[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청산리 전투]](1920년)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끄는 등 일본 군대와 교전하여 여러 차례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이후 밀산을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은 탓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도 있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직위)|주석]] 등에 임명되는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에는 한족연합회),[* [[빈주 사건]]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하고 [[항렬]]이 같은 아우뻘인 [[김종진(동명이인)|김종진]][* 김종진도 1년 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피살된 것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정작 [[정화암]] 선생이 [[이정식]] 선생에게 한 면담, [[이강훈(독립운동가)|이강훈]] 선생 증언을 보면 가해자가 [[공산당]]이 아닌 기존 한족총연합회 내부 세력으로 나온다. 이강훈, 『민족해방운동과 나』. 서울:제삼기획, 1994; 면담: 이정식; 편집해설: 김학준; 수정증보: 김용호,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 [[김성숙(1898)|김성숙]]·[[장건상]]·[[정현섭]]·이강훈의 독립투쟁』, 서울: 민음사, 2005 참고.] 등 [[아나키스트]]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지린성|길림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에서 1930년 1월 24일 40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두한은 당시 공산당 전위대에 속해 있었으나 박용직이 전말을 알려주면서 대한민청으로 전향했다. 그 전까지 김두한은 김좌진이 친일파에게 암살된 줄 알고 있었다.] 이 때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좌진을 살해한 공산당원 박상실은 얼마 안있어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당시 만주는 [[봉천군벌]]의 위세가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후에는 봉천으로 이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1091100209202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31-09-11&officeId=00020&pageNo=2&printNo=3848&publishType=00020|고 김좌진씨 하수인 박상실에 사형판결]] 1947년 [[서울특별시]]에서 정식적으로 [[장례식]]을 가졌으며 추도사를 [[김구]]가 읽었다. 김좌진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1937년 봄에 직접 길림성 해림현으로 잠입해 그 백골을 취하여 가져와서 수습한 후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김복한]]의 묘소 인근에 가명으로 밀장되었다가 1957년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겨진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있는 선산에 아들 김두한에 의해 아내 오숙근과 합장되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여러 교육 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