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주열 (문단 편집) == 기타 == *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한 범인 박종표(朴鍾杓)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경찰 일을 한 헌병보(補) 출신이다. 당시 마산경찰서 경비주임으로, 3월 15일 선거 당일 밤 1차 시위 때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시위 현장에서 즉사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하고 손석래 당시 경찰서장의 지시를 받고 다음날 새벽 지프차에 싣고 가 돌을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유기한다.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기자의 취재에 따르면 박종표는 이후 4.19혁명재판소에서 최루탄을 발사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사실을 자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다시 시신 유기만 인정하고 최루탄 발사는 부인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고 한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https://vaco2008.tistory.com/m/7328564|출처]] *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김주열의 시신이 자연사라고 발표하라며 안 그러면 빨갱이로 몰아 쏴죽인다느니 의사들에게 협박하던 강력반 형사도 있었다고 묘사된다. 나레이션에 따르면 이 형사는 4.19 이후에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다고. * 김주열의 묘지는 3곳에 조성되어 있다. 실제 묘는 고향인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에 있으며 서울 4.19 민주 묘지와 마산 3.15 민주 묘지에 각각 가묘(假墓)가 있다. * 중학교 시절 모 잡지를 통해서 알게 된 [[충청도]]의 한 고학생 오웅진과 [[펜팔]]을 했는데, 그는 훗날 [[가톨릭]] [[신부(성직자)|신부]]가 되어 [[꽃동네]]를 세웠다. * 어머니 권찬주는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으나 생전 3·15 의거나 4·19 혁명 행사가 열린다고 하면 마산이든 서울 수유리든 어디든 꼭 참석했다. 1989년 사망했다. 권찬주 여사 생전인 85년, 한 여성지에서 인터뷰할 때 학생운동이 연이어 일어나던 당시에도 "20년도 지났음에도 여전하다"면서 [[운동권]] 학생들에게 국밥이라도 더 주고 싶다며 죽은 아들을 잊지 못했다. 김주열에 대해 "제일 똑똑하고 착한 아들이었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가슴 아파하면서도 항상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3·15 의거 62년째인 2022년 말에야 시위 참여자로 공식 인정을 받았다. 막내아들 김길열은 최근 국가보훈처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국가유공자로 등록해달라고 신청했다.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것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다가 희생된 형의 뜻을 온전히 기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3·15 의거가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역할을 했다고 본다. * 아버지는 김주열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술에 매달렸고 결국 5년 만에 43살로 요절했다. 씁쓸하게도 큰형 김광열도 시위 도중 주열의 손을 놓쳐 잃어버린 것에 대해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다가 병에 걸려 아버지와 같은 43세의 나이로 어머니보다 2년 먼저 사망했다. 어머니와 같은 해인 2022년에 비로소 3·15 의거 시위자로 인정되었다. 김주열에게 마산상고를 권유한 그의 친구 하용웅도 같은 시기에 인정받았다. * 김주열이 죽을 당시 5살이던 막내아우인 김길열이 회고하길, 불과 1년 뒤에 [[군사독재]] 시대가 시작되면서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내내 집안이 빨갱이로 몰려 상시 감시를 받으며 고생했다고 한다. 어머니 권찬주 여사는 박정희 정권 들어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 남원을 떠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김길열씨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서울 현저동에서 어머니가 [[하숙]]을 쳐서 자식들을 가르치다 감시를 피해보려고 연희동으로 이사 갔지만 소용없었다. 자그마치 26년이 지나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야 그 짓거리가 멈추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둘째 누나 김경자도 요절했다고. 김길열과 큰 누나 김영자만 살아있다. * 제11대, 제14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병오(정치인)|김병오]]의 [[당숙|당숙부]]이다. * 김주열은 시험을 본 [[마산상업고등학교]]에 합격했고 장학생으로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본인은 그 사실을 알기 전에 사망했다. 35년 후인 1995년 4월 11일, 마산상업고등학교는 김주열에게 명예졸업장을 추서했고 [[http://naver.me/xaGVBgqg|그 졸업장은 김주열 열사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 1987년 똑같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열사]]로 [[이한열]] 열사가 있다. 각각 [[4.19 혁명]]과 [[6.10 민주 항쟁]]의 원인이 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이한열 열사는 머리 뒤쪽에 최루탄을 맞고 사망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 최루탄을 맞고 즉사한 김주열 열사와는 다르게 [[이한열]] 열사는 즉사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다르다. * [[https://www.yna.co.kr/view/AKR20160315138800052|2016년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차량을 운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해 당시 정황을 상세하게 증언했고]]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89725#dvOpinion|열사에게 사죄하고 묘지를 참배했다.]] * 2022년 1월 27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다루었다. [[https://youtu.be/A_M6NbAHRhc|영상]] * 그를 다룬 창작물로는 문서 상단 위에 인용된 시 외에도 [[고은(시인)|고은]]의 <김주열>이 있다. ''''하나의 죽음이/혁명의 꼭지에 솟아올랐다''''고 묘사하는데, [[만인보]] 21권에 수록된 작품이다. 만인보 21~23권에는 이 시를 포함해 총 416편에 달하는 [[4.19혁명]] 관련 시가 실려있다. 만인보만의 특징은 김주열 본인만이 아니라 그 관련자들도 다룬 작품이 있다는 것이다. 형을 다룬''' <김광렬>'''[* 시 내용 일부: "경찰의 총사격이 이어졌다/뒷산으로 흩어졌다/주열은 없고, 광열은 있다"], 어머니를 다룬 '''<권찬주 여사>'''[* 시 내용 일부: "그 뒤 죽은 아들이 바다 밑 홍합 대신 떠올랐다/그 어머니에게/죽은 아들도 산 아들이었다"], 그외에 '''<어떤 낚시질>'''처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던 모습을 묘사한 시도 있으며[* 시 내용 일부: "김주열의 시체였다/경찰이 던져버린 시체가 27일만에 밀려왔다/ 27일만에 떠올랐다/쇳조각이 박혀 있었다"], 사체유기범을 다룬 '''<박종표>'''나, '''<어부 김기돈>'''[* 시 내용 일부: "그러다가 덜렁 무거운 것/잡아당겼다/시체/흰 메리야스/잿빛 반지/눈두덩에 5센티 최루탄이 박혀 있다"]처럼 시신 발견자를 다룬 시도 있다.[[https://eunjinlee.tistory.com/m/entry/%EB%A7%8C%EC%9D%B8%EB%B3%B4%EC%97%90-%EB%82%98%ED%83%80%EB%82%9C-%EB%A7%88%EC%82%B0%EC%9D%98%EA%B1%B0|출처]] [[분류:1944년 출생]][[분류:남원시 출신 인물]][[분류:1960년 사망]][[분류:폭발물에 죽은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살해된 인물]][[분류:마산용마고등학교 출신]][[분류:열사]][[분류:4.19 혁명]][[분류:시위의 상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