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지하 (문단 편집) === 반독재 투쟁 시절 === [[파일:52149191.1.jpg]] 1960년 [[4.19 혁명]]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계속 학생운동을 했으며,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경찰의 수배를 피해 고향 목포시 등지에서 항만 노동자, 광부 등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1964년 6월에는 '서울대학교 6.3 한일굴욕회담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6.3 항쟁]]에 참여했다가 수감되어 4개월간 복역했고, 1966년 8월, 7년 6개월만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1970년 저항시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독재]]에 항거하다가 정권의 눈 밖에 나서 [[필화]]를 입었고, 그는 반공법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 시기에 소리꾼 임진택이 담론시 '비어'의 첫부분인 '소리내력'을 판소리화하기도 했다. 1971년 가수 [[김민기(가수)|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2년 후 김민기는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에서 [[주여, 이제는 여기에]]를 작곡한다. 1973년 4월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金玲珠)와 결혼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전남 홍도 영화촬영장에서 체포된 후 옥고를 겪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1980년에 석방되었다. 1975년 〈[[타는 목마름으로]]〉[* 이 시는 노래로 만들어졌고, [[안치환]]이 부르면서 수많은 운동권 세력이 부르기도 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 노래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 다만 [[폴 엘뤼아르]]의 '자유'와 그 형태가 너무 유사해서 [[표절]]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가 발표되었다. 적극적으로 독재에 저항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으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이러한 모습을 대단하게 여기는 동시에 너무 열혈이 지나친 거 아니냐며 많은 걱정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일로 인하여 [[노벨평화상]]과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추천된 경력도 있으며,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975년 수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정지용]] 문학상, [[만해문학상]]까지 수상했을 정도의 대단한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김지하의 시는 초기 〈오적〉으로 대표되는 재기 넘치는 풍자 정신을 보여주는 시편과 감옥에서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중기의 시들을 통해 우리 문학사에 큰 족적으로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