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책시 (문단 편집) == 역사 == 역사적으로 [[길주군]]의 일부였다가, 1898(광무 2)년 성진군(城津郡)으로 분리되었고 1899(광무 3)년 함북 최초의 개항장으로 지정되면서 '''성진부'''(城津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길주와 합쳤다 나뉘었다를 수차례 반복했고 이 문제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1903(광무 7)년에 최종 분군 확정. 길주와 합쳐질 때는 '''길성부'''(吉城府, 길주와 성진의 앞글자를 따서)로 바뀐 적도 있다. 이 당시의 자세한 역사는 다음과 같다. > * 1898년: 길주군 일부를 성진군으로 분리 > * 1899년: 성진군을 성진부로 승격 > * 1900년: 성진부와 길주군을 길성부로 통폐합 > * 1900년: 길성부를 성진부로 개칭 > * 1901년: 성진부를 폐지하고 길주군으로 강등 > * 1902년: 길주군을 길주부로 승격 > * 1903년: 길주부를 길주군으로 강등 > * 1903년: 길주군 일부를 성진군으로 재분리 > * 1906년: 성진군을 성진부로 승격 [include(틀:일제강점기의 부)]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직후인 1910년 성진부에서 '''성진군'''으로 강등되었고, 1931년 성진면이 성진읍으로 승격되었다. 1941년 성진읍이 '''성진부'''로 승격되면서, 성진군의 잔여지역이 '''학성군'''(鶴城郡)으로 개칭됐다. 일제의 대륙 침략 정책에 따라 '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 이게 성진제강연합기업소의 전신이다.]을 비롯한 각종 공장이 들어서 공업 도시로서도 이름을 날렸다.[[http://www.kyeongin.com/main/view.php?key=20170924010007600|#]] 해방 이후 '''성진시'''로 바뀌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곳 출신이자 이 때 사망한 [[김책]]을 기리기 위해서 성진시와 학성군을 각각 김책시와 김책군으로 개칭했고, 1961년 두 시와 군을 합쳐서 김책시로 만든 것이다. --도농통합-- 북한의 시/군 단위 광역행정구역 중에서 사람 이름을 딴 곳이 총 다섯 곳인데, 이 김책시와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문덕군]]이다. 김책시와 문덕군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은 모두 [[량강도]] 산하이다. [[김형직군]], [[김정숙군]], [[김형권군]] 모두 추운 [[개마고원]] 지역이고, [[김형직군]]과 [[김정숙군]]은 아예 압록강을 끼는 한반도 최북단 국경지대인 것을 감안했을 때 어쩌면 김일성은 자기 가족 이상으로 [[김책]]을 특별 대우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김일성의 일가나 심복 넷 중에서 [[북한]]이 대대적으로 공업 단지를 조성해가며 육성한 곳은 김책시 하나 뿐이다. 어쨌든 상당히 큰 규모의 시로, 북한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큰 도시이다. 출발부터 11시 89군 중의 시 단위로 출발했다. 한때는 [[라선시]]보다 인구가 많았던 적도 있었다.[* 광복 당시 나진시는 3만 명, 성진시는 9만 명이었다. 범 나진권은 12만 명, 범 성진권은 14만 명.] 하지만 함경북도의 최초 개항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도시 자리는 [[청진시]][* 광복 당시 23만 명으로 [[함흥시]](12만 명)보다도 인구가 많았다.]에 빼앗겼으니 일본의 [[하코다테시]]와 [[삿포로시]]의 관계와 비슷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