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태촌 (문단 편집) === 상경과 다툼 === [[파일:0000.jpg|width=400]] 여느 [[조직폭력배]]들처럼 그 역시 20살도 되기도 전에 3차례나 소년원을 들락날락거린 전과 기록이 있다. 소년원을 들락날락거리며 같은 전남 출신인 [[조양은]]을 알게 되었다. 김태촌이 조양은보다 나이가 2살 더 많은데(김태촌 1948, 조양은 1950), 서울로 진출했을 때는 둘 다 20살을 조금 넘긴 약관의 나이였다. 둘 사이에는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나이는 김태촌이 조금 더 많았지만, 조양은이 더 빨리 상경해서 전국구 조폭인 조창조-오종철 세력에 편입되었으며, 특히 [[신상사]]파와의 항쟁으로 인하여 조양은이 유명세를 타고 그에 대항하는 적이 많아지면서 조폭계의 핫 아이콘이 되자, 김태촌은 신상사 및 호남계 선배들의 힘을 업고 조양은을 치게 되었다. 여기에 김태촌을 견제하기 위해 불러들인 이동재가 끼어들면서 김태촌의 서방파, 조양은의 양은이파, 이동재의 OB동재파 소위 호남계 3대 조폭의 항쟁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 나이가 지긋이 든 그 둘의 회고담이 재미있다. 조양은은 자기가 주도하여 김태촌, 이동재와 만나서 자기가 큰 형, 이동재가 둘째, 김태촌이 막내가 되기로 하고 항쟁을 끝내자고 했으나, 김태촌이 배신을 하여 항쟁이 계속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태촌은 자기가 나이가 가장 많고 이동재는 한참 어린데 무슨 큰 형이 조양은이었냐면서 그때의 만남은 호남 조폭 선배가 불러서 얼굴 한 번 본 것 뿐이라 주장하고 있다. [[1970년대]]에 서울에 상경해서 그보다 먼저 서울에 자리잡고 있던 [[조양은]]의 양은이파와 극심한 대립과 항쟁을 벌였다. [[1975년]], 명동 사보이호텔 사건이 일어나자 조양은의 형님인 오종철을 작업하여 불구로 만든 뒤 은퇴시켰다. 한편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후 [[1977년]] 세력을 확장하다가 체포되었다. [[1978년]] 조창조가 신상사에게 항복하고 사과하면서 김태촌과 조양은도 구치소에서 만나서 화해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