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태촌 (문단 편집) === 정치깡패 === [[파일:attachment/a0102535_4976413431bdc.jpg|width=400]]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가지게 된다. 당시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과 [[이철승]][* 당시 [[이철승]]은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회의적이었고, 결국 [[차지철]]의 지원을 등에 업고 조폭을 동원하여 당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결국 [[1976년]] 전당대회에서 승리하고 총재가 된 이후에는 '참여하의 개혁' 이란 명분으로 반독재투쟁은 외면하고 철저하게 유신정권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결국 이철승은 '[[사쿠라(정치)|사쿠라]]' 라는 멸칭이 생겼다. 결국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이후에 민주화세력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몰락한다. [[이철승]]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냐면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서울의 봄]] 시기가 되자 학생들이 이철승 자택에 불을 질렀다. 이철승은 이후 노골적인 극우인사가 돼서 과거 군부독재 정권을 찬양하였다. 이철승 대표의 딸인 [[이양희(1956)|이양희]] 교수는 [[2012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신민당 의원의 사주를 받은 김태촌은 수하 조직원 수백여 명을 동원해서 대낮에 신민당사를 습격하고, 전당대회장에 난입해서 난투극을 벌이는 등 정치깡패로서 막장행태를 보였다. 이 사건으로 김태촌은 '''[[신민당(1967년)|신민당]] 노동국 차장'''이 되었으며,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 공천 약속까지 받아냈다고 한다. 참고로 이 때 김태촌의 나이 고작 '''25세'''. 아무튼 이것으로 김태촌은 정계진출까지 꿈꾸게 된다. 하지만 이듬해인 [[1977년]] 다른 사건으로 체포된다.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것이다.[* 이처럼 정당의 당권 투쟁에 조직폭력배가 개입한 사례는 [[195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정보기관을 동원하고 돈과 조직폭력배를 이용해서 야당 내분을 조장하고 친정부적인사 일명 [[사꾸라]]로 불리는 의원들을 야당 주류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당 입장에선 자신의 세력을 견제하는 야당이 분열해 여당을 견제할만한 힘을 잃거나, 야당 내에서 친여당세력이 당권을 잡게 되면 상당한 이익이기 때문이다. [[1986년]], [[김용남(1950)|용팔이 사건]]이 대표적이다.] [[1980년]]에 폭력혐의로 구속되어 [[1986년]]에 출소한 뒤 김태촌은 [[민중민주당(1986년)|민중민주당]][* [[1985년]], [[신한민주당]] 내에서 당시 민정당이 주장하던 [[의원 내각제]] 개헌 수용을 주장하던 유한열 국회의원 등 12명이 '신보수회'라는 당내 서클을 만든 다음 이듬해인 [[1986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만들었던 정당이다. [[1987년]], 다시 신한민주당과 합당하였다. 그러나 대표인 유한열을 위시해서 대부분이 다시 민주정의당, 한나라당으로 들어갔다.]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총재로 선출된 [[유한열]][* [[1950년대]]부터 [[야당]]의 거물이던 [[사쿠라(정치)|사쿠라]]인 [[유진산]]의 아들. 충남 금산을 정치적 기반으로 여러차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90년]] [[민주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의원의 측근이 되었다. 한편 [[김대중]]-[[김영삼]] 세력이 합작하여 창설한 [[민주화추진협의회]]의 의장권한대행 [[김상현(1935)|김상현]]을 도왔다고 본인은 주장한다. 김태촌은 김상현을 고향 선배로 깍듯이 모셨으며 공천 비용으로 진 빚을 해결하는 데 '''힘을 써주는''' 등의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상현이 정권의 표적이 되자 남산에 끌려가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3박 4일 동안 당했다고 한다. 재야민주화운동을 하던 [[장영달]]을 숨겨주다가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Print/81171|#]] 또한, [[이해찬]] 국회의원이 민청련 30주년 추모식에서 [[김근태]] 의원을 추모하면서 "당시 근태형이 김태촌 집에서 체포되었다"고 언급한 것으로 봐서 운동권 인사들을 자기 집에서 숨겨주긴 한 모양이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5404627|#]] 당시 교도소에서 대장 노릇하던 조폭들과 [[학생운동]]하다가 [[교도소]]에 간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친분이 어느 정도 있었던 사실이긴 하다. 사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 개입한 것도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전북 출신인 이철승을 신민당 총재로 만들기 위해선 부산 출신인 김영삼을 제거해야 하고 그래야 이후에 호남 대통령을 배출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을 보면 김상현, 장영달을 도왔다는 게 사실이라면 말 그대로 자기 고향 사람 도와준다는 취지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더구나 [[김상현(1935)|김상현]]이 의장권한대행이었다는 사실관계도 틀린데,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창설하던 [[1984년]] 당시에는 [[김대중]]은 [[미국]]에 망명한 상태였으며, [[김영삼]]은 가택연금중이었던 터라 김상현이 대리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1985년]]에는 김대중이 귀국했고, 김영삼은 가택연금이 풀렸으므로, 두 사람 모두 [[신한민주당]]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던 시기이다. 김태촌-김상현 관계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확인이 필요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