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한수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82132> [[KBO 골든글러브|[[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height=40]]]] [br] [[틀:KBO 골든글러브/3루수|'''{{{#b58a5d KBO 골든글러브}}} {{{#ffffff 3루수 부문 수상자 (1998~1999, 2001~2004)}}}''']] || 삼성 라이온즈에 지명받기 전까지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한 서울 토박이다. 서울 동작구에서 태어났다. [[상도동(서울)|상도동]]에 있는 서울강남초등학교에 진학하여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후 양천구 신월동 소재 신월중을 거쳐 역시 신월동 소재 광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야구부|중앙대학교]]에 진학했다. 중앙대 야구부 시절 우상 [[장종훈]]을 만나 많은 조언을 들었다고 한다. [[김진영(1935)|김진영]] 前 [[삼미 슈퍼스타즈]] 감독과 [[김경기]] [[SK 와이번스 2군]] 감독 부자(父子)와 더불어 [[KBO 리그]]의 대표적인 '''부자 야구스타'''로 유명했다. 김한수의 아버지인 김영복 前 [[농협 야구단]] 감독은 1950년대 등번호 '''5번'''을 달고 실업야구를 주름잡았던 명 '''3루수''' 출신의 야구인이었다.[*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김진영(1935)|김진영]] 前 감독과는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에서 인천고 50년대 전성기를 열었다. 유격수 김진영, 3루수 김영복. 이후 두 사람 모두 국가대표에도 함께 선발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아들인 김한수도 대를 이어 '''3루수'''를 맡았고 현역 시절 등번호도 아버지와 같은 '''5번'''을 달았다.[* 김영복 씨는 2000년 막내아들이었던 '''김한수의 결혼식 전날에''' 급정거하는 버스 안에서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고 2달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295&aid=0000000006&redirect=true|돌아가셨다고 한다]].] 강남초등학교 5학년 때에 야구를 시작했으며, [[장종훈]]을 존경했다고 한다. 또한 [[양준혁]]과 마찬가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할 뻔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중앙대 시절에 그다지 유명한 선수가 아니었던 김한수를 당시 신생 팀이었던 쌍방울이 김한수를 지명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김한수 본인도 쌍방울이 지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정작 삼성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자 본인도 놀랐다고 한다.] 핫 코너의 [[본좌]], [[김성래]] - 김한수라는 삼성의 5번라인 중 한 명. 한때 [[김종훈(1972)|김종훈]]과 함께 삼성 가을야구의 쌍두마차로 역임을 했다. [[OB 베어스]] - [[두산 베어스]]의 [[안경현]] - [[장원진]]에 뒤쳐지지 않는 최강의 쌍두마차로 꼽히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1995년 유니폼의 전성 시대를 이끌었던 3김 타자 중 한 명이다.[* 나머지는 [[김종훈(1972)|김종훈]], [[김재걸]].] 단 나이로 보나 커리어로 보나 인지도로 보나 가을에만 강하고 커리어 상 주전에는 한끗 못미친 둘보다 김한수가 한 수 위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imnews.imbc.com/kimhansoo1_600.jpg|width=100%]]}}} || 주전 3루수였던 [[김용국(야구)|김용국]]이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자, [[우용득]] 감독은 3루수 후보로 김한수를 낙점했다. 또한 그 뒤를 받칠 [[김태룡(1968)|김태룡]]이 수비로는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워낙에 타격이 빈약했던지라 김한수는 신인시절부터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1995년과 1996년 사이 방위병으로 복무하게 되여 반쪽짜리 선수가 되었고[* 그 시기에 [[이동수(야구선수)|이동수]]가 신인왕을 탔고, [[홍현우]]가 3루수 골든글러브를 차지했다.], 부상으로 시즌을 통째로 쉬기도 했다. 1996년 5월 21일 방위병에서 소집해제된 후 투입예정이였지만 손바닥, 무릎 부상으로 30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치고 1997년 [[백인천]] 감독 아래에서 본격적인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이승엽]]-[[정경배]]-[[김태균(1971)|김태균]]-김한수로 이어지는 삼성의 철벽 내야진 라인업으로 종횡무진하며 맹활약하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트레이드 떡밥이 나돌던 선수. 대표적으로 1997년 삼성이 현금 트레이드로 해태의 [[조계현]]을 영입했을 때도 원래는 현금이 아닌 김한수가 해태로 트레이드될 뻔했다는 설이 있었고[* 김한수가 1998년 해태 3루에서 그 정도 했으면 해태는 4강이 아니라 2위도 넘볼 수 있을 만큼 2위와 5위의 차이가 몇 경기 안났다. 김한수와 포지션이 겹치는 홍현우야 2루로 가면 되니까.] 2000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최대어로 떠올랐던 [[홍현우]]가 만약 삼성으로 갔으면 김한수는 벤치워머 신세 내지는 트레이드 카드 신세밖에 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여기서 삼성 [[프런트]]가 김한수를 믿고 홍현우 영입을 포기했다는 일설이 있다는데 1999 시즌은 김한수 개인적인 커리어 하이었지만 99시즌은 역대급 타신투병 시즌이었던 데다가[* [[한국프로야구/1999년]]에 잘 나와 있다.] 김한수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게 군복무를 마치고 98년도부터로 이 당시에는 별로 보여준게 없었다. 그래서 2000년에 상당히 부진했을때 삼성이 홍현우를 FA로 영입할 거라는 예상이 유력했을 정도였다. 어쨌든 당시 홍현우의 공격력이 워낙 압도적이었던 데다가 홍현우는 1990년대 누적 WAR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보여준 게 있었다. 게다가 홍현우는 [[이종범]]이 일본으로 간 뒤로 정성철이 유격수를 보는 대신 가끔 유격수로도 뛰었다. 즉, 내야 아무 포지션이나 뛸 수 있는 선수가 타격, 수비, 선구안, 주루 모두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데려왔으면 어떻게든 쓰일 수 있었지만, 그냥 삼성이 FA로 영입을 안 했고 이것이 신의 한수가 되었다.[* 당시 홍현우의 몸 상태를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던 삼성이 홍현우와 계약을 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옵션 조건을 걸어서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 홍현우는 당시 삼성 못지않게 FA에 돈을 많이 투자하던 [[LG 트윈스]]로 갔다.[* 다만 홍현우의 몰락은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상태였다. 30-30을 찍으며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던 1999 시즌 전 무리하게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게 되며 장타력을 불리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결국 무릎 부상으로 이어졌고 실제로 FA 직전이었던 2000년에는 그 여파로 전년도보다 성적이 하락한 상태였다. 그리고 LG로 간 이후 그 후유증이 제대로 나타나며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고 은퇴하고 만다.] 비슷한 시기에는 [[두산 베어스]]의 [[김동주(타자)|김동주]]와도 트레이드가 이루어질 뻔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2000년 혹은 2001년경으로, 당시 두산에서 연봉 문제로 갈등이 있던 골든 글러브 경쟁자 [[김동주(타자)|김동주]]를 삼성이 김한수와 현금을 내주고 영입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었지만, 두산에서 추가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그냥 트레이드를 안 하고 넘어갔다는 비화도 기사로 나온 바가 있다. 그리고 두산이 추가금을 요구한 게 당연했다. 당시 김동주는 20대 초중나이로 OPS 0.9~1.0을 넘기를 밥먹듯이 하던 리그 최고의 타자였는데, 김한수는 김동주에 비해서 공격력이 좋지 않았던 데다가 나이도 이미 30대에 접어든 상황이었다. 실제로 당시 김응용 감독도 강력하게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이후 주전 3루수를 찾던 롯데와 KIA의 요청으로 트레이드될 뻔했던 일화도 있었을 정도로 트레이드 떡밥이 많던 선수였다. 하지만 김한수의 경우 수비가 괜찮은 수준이었고 2000년 한 해만 폭망했지 한 5년간은 꾸준히 타율 0.280, 15홈런 정도를 쳐줬던 선수였던 데다가 WAR 2~4 정도 찍었을 정도로 준수했기 때문에[* 특히 2002년은 제 2의 커리어 하이었다.] 은퇴할 때까지 삼성이 붙잡고 있다가 확연히 성적이 떨어진 2006년을 기점으로 밀려난다. 팀의 가을야구 진출과 2002년, 2005년의 우승 주역으로 활동했으며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에는 팀의 주장으로 활약했다. 준우승을 이루어낸 [[2004년 한국시리즈]] 9차전에는 4번 타자로 활약하기까지 했다. 2004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고, 한 때 삼성과 협상이 결렬되어 팀을 떠날 위기에 처했으나, 우선 협상 마지막 날 4년 총 28억원(계약금 10억원, 연봉 4억원, 옵션 2억원)에 삼성과 계약하였다. 삼성과 재계약이 무산됐을 경우 [[롯데 자이언츠]]행이 매우 유력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295/2008/04/02/ba_04.jpg|width=100%]]}}} || 이후 2005년 [[선동열]] 감독이 부임한 뒤 골든글러브 유격수 출신 [[박진만]]이 FA로 합류하고 전년도 유격수를 맡던 [[조동찬]]이 3루수로 가게 되었고 이미 30대 중반에 나이에 접어든 김한수는 자동적으로 1루수로 전향하며 10년간 정들었던 3루수를 포기하게 된다. 1루수 전향 첫 해인 2005년에는 타율 0.293에 15홈런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였으나 2006년부터 노쇠화가 시작되며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5년 한국시리즈]]에선 16타수 3안타를 기록하고 이듬해 [[2006년 한국시리즈]]부터는 21타수 1안타 타율 0.048을 기록하면서 큰 경기에서 기량이 떨어졌다. 한 때 [[KIA 타이거즈]]와 트레이드설도 있었다.[* 당시 부상과 태업 의혹까지 받던 투수 [[임창용]]과 함께 KIA의 병역문제가 해결된 좌완투수 [[전병두]]를 상대로 트레이드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결국 2007 시즌 후 은퇴, FA 계약기간이 1년 남아 있던 2008년에는 마이너스 옵션 5천만원을 삭감한 금액인 3억 5000만원의 잔여연봉을 받으며 2군 플레잉 코치로 뛰었다. 은퇴식은 3월 30일 대구 KIA전에서 열렸으며, 삼성 선수 출신 은퇴식은 [[류중일]]-[[김현욱(야구)|김현욱]] 이후 3번째였다. 현역으로 뛰던 당시 수비만은 국내 정상급의 3루수였으며 언제나 안정된 수비로 [[김태균(1971)|김태균]], [[김재걸]]과 더불어 삼성의 철벽 내야진 구축에 일조했다. 김한수의 [[폭풍간지]]같은 수비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일품이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는 1999년 한 시즌 무실책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1999년 김한수의 실책은 12개.] 선수 시절 골든 글러브 3루수 부문 경쟁에서 김한수 6회 수상, 김동주 3회 수상으로 논란이 있다. 1998년 김동주의 신인시즌[* 김동주는 시즌 24개 홈런을 기록했지만 0.265 타율로 규정타석 기준 김동주 커리어 로우 시즌이며 WAR도 김한수가 조금 높다. 그리고 [[스캇 쿨바]]라는 압도적인 3루수가 있었다.]경우 김한수가 비교 우위이다. 1999년은 김한수의 커리어 하이이며 3루수 중 WAR 1위를 기록하며 수상했다. 00년은 김동주의 커리어하이 압도적 시즌으로 수상했다. 01년 김동주는 지명타자였고 김한수의 성적도 충분했다.[* 3루수 WAR 3위, 타율 2위, 타점 1위, 홈런 4위 등] 02년이 가장 논란이 있는 시즌이다. [[김동주(타자)|김동주]]와 [[호세 페르난데스(1974)|페르난데스]]가 압도적 성적을 기록했지만 삼성의 우승이라는 버프로 김한수가 수상했다. 03년에는 김동주는 지명타자였고 김한수의 성적도 충분했다.[* 3루수 WAR 3위, 타율 2위, 타점 1위, 홈런 2위 등] 04년은 [[이범호]]가 3루수 중 압도적인 성적[* 3루수 WAR 1위 타율 1위 홈런 1위 OPS 1위 최다안타 1위 타점 3위]을 기록해서 역시나 논란이 있는 시즌이다. 한국 프로야구 3루수 골든 글러브의 계보는 [[한대화]]-[[홍현우]]-김한수, [[김동주(타자)|김동주]]-[[이범호]]-[[최정]]으로 볼 수 있는데 타격 성적만 본다면 가장 떨어진다. 김동주는 커리어 대부분 김한수의 타격을 압도했으며 홈런은 모든 시즌에서 우위에 있었다. 거기다 김동주가 속한 [[두산 베어스]]의 홈 구장은 그 드넓은 잠실이었던 반면, [[삼성 라이온즈]]의 홈 구장은 시민구장이었으니. 타격성적만으로 골든글러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는데 수비 하나로 눌렀다기에는 논란이 많은 수상기록이다. 물론 수비실력이야 김한수가 우위였어도 대부분 타격성적이 김동주가 '''넘사벽'''이었으며, 수비에서도 김동주는 국가대표팀에서 3루수를 볼 만큼 돌글러브도 아니다. 삼성의 호성적과 김동주가 데뷔 초부터 잦은 부상과 사생활 문제로 인한 논란을 일으키면서 김한수가 혜택을 받았다는 게 중론이다. 전체적인 선수 시절의 커리어를 따져볼 때는 등번호 5번의 전 주인인 김성래와 달리 임팩트 있는 성적을 남긴 적은 없으나, 꾸준히 제 몫을 다해준 타자로 평가받는다. 통산 1497경기에 출장하여[* 본인은 1500경기 출장 못한 게 아쉽다고.] 타율 0.289, 149홈런, 1514안타, 782타점에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6회 수상, 최다 사구 2위, 최다 끝내기 안타 1위라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그의 전성기가 타고투저가 강했던 99~03년인걸 감안하더라도 거의 6000타석 가까이 들어서서 통산 wRC+가 112.4에 sWAR*가 34.36으로, 2000년을 제외하면 늘 제 몫을 해주던 선수였다. 괜히 별명이 '''소리 없이 강한 남자'''겠는가? 특히 뛰어난 수비와 적당한 타격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2002년, 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크게 공헌한 측면에서, [[박석민]]이 등장하기 이전 라이온즈 역사상 가장 뛰어난 3루수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어떻게 보면 [[강석천]]과 굉장한 비슷한 경우.[* 다만 강석천은 김한수와 달리 골든글러브를 한 번도 수상한 적이 없으며, 통산과 누적성적 모두 김한수에게 밀린다.] [[초구]]에 강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김한수의 타격론으로는 경기 말 찬스 상황에서는 투수가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는 확률이 높아서 초구를 집중적으로 노린 게 타자 입장에서는 유리하다는 것이 그의 타격론이다. 또한 [[이정후]], [[박병호]], [[김하성]] 이 세 사람이 몸쪽 공을 통타할 때 나오는 몸통스윙과 특유의 팔로스루 동작은 김한수의 시그니처 스윙이자 주무기였는데. 이 중 박병호는 직접 김한수에게 조언을 구했고 김한수 역시 팔을 재빨리 놓아(만세타법에서 만세를 하지 않고 빠르게 내려놓듯이) 배트 스피드를 강화하는 훈련을 전수했다고 한다. 이후 김한수는 KBO 정상급 선수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비법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극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