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현구 (문단 편집) ==== 일본서기를 김현구가 임의적으로 년도를 바꿔 끌어썼다? ==== 이런 주장이 존재한다. >일본서기 임나 관련 최초의 사건인 징구우황후(신공왕후,神功皇后)의 가야 7국 정벌은 신공왕후가 일본서기에 약 170~269년을 살았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 비추어 성립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현구는 이것을 갑자년 계산을 통해 임의적으로 끌어올려 369년에 벌어진 실제 사건으로 만든 후, 다만 백제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백제가 가야7국을 정벌한 일이 있다는 주장인데, 물론 그 근거는 역시 일본서기 뿐이다. 이후의 임나 관련 사건들도 근거는 일본서기뿐으로, 그 주체만 김현구의 임의적 해석에 의해 백제로 바뀔 뿐,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 되고 만다. 결론적으로 김현구의 일본서기에 대한 태도는 '일본서기가 사실이라도'가 아니라 '일본서기를 어떡해서라도 사실로'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현구 교수가 했던 년도 수정은 '''임의적이 아니다'''. 예로 [[일본서기]]에서 [[진구 황후]]가 했다고 설명된 업적은, '''실제로는 [[근초고왕]]이 일구어 낸 업적을 조작했다는 건 이미 예전에 드러났다''' 근초고왕이 이룬 [[삼한정벌]]을 왜의 가상인물, [[진구 황후]]가 했다고 조작을 한 것이다. 또한 년도 자체도 학계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한성도읍기 시대의 백제의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이 '''즉위하거나 사망한 시기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되 '''딱부러지게 120년의 차이'''가 난다. 학계에서의 통설에서는 일본 측에서 기록을 정리하면서 고의적으로 '''연대를 2갑자''' 즉 120년으로 '''올린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현구가 아무 검증없이 임의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물론 백제의 가야7국정벌도 학계에서 비판받긴한데, 비판 받는 게 곧 [[임나일본부설]]이나 [[일본 우익사관]]이 되진 않는다. 이것이 원문이다. >일본이 임나를 중심으로 백제와 신라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기사가 『일본서기』369년의 기록이다. 『백제기』를 원용한 369년 기록……이 기록의 요지는 일본이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7국을 평정한 다음 [[침미다례]](강진)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자, 백제왕이 영원히 일본의 서번이 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일본이 임나(가야)지역을 중심으로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중에서도 이때부터 200년 가까이 지배하게 되었다는 가야7국에 대한 평정이 임나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가 분주에는 '''백제의 장군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분주에서는 목라근자의 성을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당시 백제에는 목(木)이라는 유력한 성씨가 존재했고 일본에는 '목(木)'이나 '목라(木羅)'라는 성씨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야7국을 평정한 중심인물인 목라근자는 백제 장군이 분명'''하다. 가야7국을 정벌한 작전을 보면, 탁순, 즉 대구에서 시작하여 가야7국을 평정하면서 한반도의 남해안을 서진한 백제장군 목라근자와 백제의 수도 한성에서 서남쪽을 향하여 남하한 근초고왕과 왕자 귀수의 군대가 고해진(강진)에서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결과 양군에 둘러싸인 형태가 된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구 마한 지역이 자연히 항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라근자와 근초고왕이 중심이 된 이 작전은 전체적으로 구 마한지역에 대한 백제의 작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가 일본이라면 작전은 일본에서 도착하는 한반도의 남해안에서 개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목라근자가 중심이 되어서 진행한 작전은 내륙인 대구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구는 백제가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겹지는 될 수 있지만, 왜군이 가야7국을 평정하는 집결지는 될 수 없는 곳'''이다. 또 가야7국 평정의 주체가 일본이 아니고 백제라는 사실은 '''목라근자 등이 "남만 침미다례"를 취해서 백제에게 주었다는 표현'''으로도 알 수 있다."남만 침미다례"에서 ''''남만'은 '침미다례'의 방향을 표시하는 말인데, 침미다례는 백제의 입장에서 본 다면 '남만'이 되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만'이 된다.''' 이로써 침미다례나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는 백제였음을 알 수 있다. '남만'이라는 표현은 가야7국 평정의 주체를 일본으로 바꿔 쓰면서 부주의로 남겨놓은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역사를 완벽하게 날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근초고왕 때 가야7국을 평정한 나라가 일본이 아닌 백제라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일본서기』541년 4월 기록에는 '''"백제 성명왕이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근초고왕), 귀수왕(근구수왕) 치세 때에 안라 가라 탁순의 한기(왕과 같은 존재) 등이 처음 사신을 보내 상통하여 친밀하게 친교를 맺었다. 자제의 나라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기록에도 "성명왕이 임나에게 이르기를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 귀수왕이 당시 임나의 한기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 형제가 되었다. 이에 나는 그대를 자제로 알고, 그대는 나를 부형으로 알았다.''' 같이 천황을 섬겨 강적에게 항거하였다[* 이 인용문에는 천황이라고 말했다고 되어있는데 당연히 김현구 교수는 이게 실제라고 말한 적 없다. 오히려 밑에서 도움을 청했다는 내용이 조작이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또 554년 11월 기록에도 '"성명왕이 '임나와 우리 백제는 옛부터 이제까지 자제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라는 541년 기록과 대동소이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근초고왕 때부터는 '''백제가 가야제국과 부자관계 내지는 형제관계를 맺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369년 기록에 의하면 목라근자가 근초고왕과 합동작전을 펼쳐 가야 7국을 평정한다. 따라서 369년, 즉 근초고왕 때 가야7국을 평정한 주체는 일본이 아니라 백제임을 알 수 있다.……일본 학자들은 가야7국을 평정한 일본이 가야와 맺은 관계를 더욱 돈독히한 사건으로서 『일본서기』382년 기록을 든다.…… 이 기록의 핵심은 신라를 치러 갔던 사지비궤가 신라를 치지 않고 도리어 대가야를 치자 가야왕과 그 일족은 백제로 도망갔다. 그리고 가야왕이 그 누이동생을 시켜서 일본에게 구원을 청하자 일본 천황이 목라근자를 보내서 사직을 부활시켜줬다는 내용이다. '''382년 기록에서 대가야를 구원한 사람은 백제 장군인 목라근자로 되어있다. 지리적으로도 백제는 대가야와 국경을 접고 있어서 바로 구원을 나설 수 있지만, 일본이 내륙에 있는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너와서도 한반도 남쪽 지역들을 뛰어넘어야 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입장'''이었다. 더구나 '''가야왕과 그 일족이 백제에 피난해 있으면서 일본에 구원을 청했다는 이야기도 말이 안된다.''' 그리고 '''근초고왕 이래 가야와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도 일본이 아니고 백제였다'''. 그렇다면 '''이때 가야를 구원한 나라도 일본이 아니고 백제가 되어야 한다.''' -김현구,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2002, 창비, 56~61쪽 보면 알겠지만 이건 [[임나일본부설]]을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다. 오히려 '''"[[하느님]]의 [[선물]]"''' 이라는 종교적 표현을 쓰면서까지 '''"역사를 완벽하게 날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라고 감정적으로 다행이라 느끼는 문장까지 있을 정도다. 백제의 가야정벌설 자체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 비판이 [[임나일본부설]]과는 무관하다.[* 이건 [[6.25 전쟁]]연구에 오류가 있었다고 다 [[종북]]으로 모는 논리와 다를 게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