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흥국 (문단 편집) === 가수 === [[https://www.youtube.com/watch?v=IzRPmWI0gQ0|동영상]] [[파일:attachment/김흥국/이미가수랑께.jpg]]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ealminus1&logNo=221078057975&proxyReferer=https%3A%2F%2Fm.search.naver.com%2Fsearch.naver%3Fquery%3D%25EA%25B9%2580%25ED%259D%25A5%25EA%25B5%25AD%2B%25EB%258B%25B9%25EC%258B%25A0%25EC%259D%2584%26sm%3Dmtb_hty.top%26where%3Dm%26oquery%3D%25EA%25B9%2580%25ED%259D%25A5%25EA%25B5%25AD%2B%25EC%25B0%25BD%25EB%25B0%25B1%25ED%2595%259C%26tqi%3DUd7lZlpVuqwssv1ULr0ssssst6s-216068|무명시절인 1986년]], KBS에 출연한 영상. 그때는 콧수염이 없었다. 서울 종로 낙원상가에서 하루하루 벌어먹는 무일푼 밴드로 음악가 인생을 시작했다. 당시 밴드 이름은 '오대장성'으로 김흥국은 밴드의 드러머였다. 라디오스타에서 한 회고에 따르면 어머니가 말하길 갓난아기 때부터 젓가락으로 식탁을 리듬감 있게 내리쳤다고 하며 예능이나 라디오에서 이 드러머 시절 이야기로 가끔 개그를 친다. 1985년에 서라벌레코드사에서 1집을 내고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1988년 2월 15일, 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인간시대> '정아의 겨울일기(연출 정문종)'[* 해설은 성우 [[정경애]].] 편에서 불치병에 걸린 소녀를 다루었는데, 작곡가인 그 소녀의 아버지와 친분 있는 무명가수로 처음 TV를 탔다. 김흥국은 그 에피소드에서 그 소녀를 격려하기 위해 "[[https://youtu.be/3PvsxtEGJ9c|정아]]"라는 노래를 자작해 불렀다. 그 이후 이것 덕분에 TV에 신인 가수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상당히 조용한 분위기의 발라드로 김흥국의 대표곡인 호랑나비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이다. 김흥국은 늘 무대에서 담담한 표정에 분위기 잡고 통기타를 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안타깝게도 그 소녀는 1990년 경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1989년 [[MBC 가요대제전|MBC 10대 가수 가요제]]에 출연한 [[https://youtu.be/Iax__fcyQVw?t=2692|영상]]. 참고로 [[1989년]] 당시 그의 나이 30세. 이런 사연으로 방송을 타게 되었지만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것은 상당히 컬트적 느낌이 나는 댄스곡 "[[호랑나비(노래)|호랑나비]]"다. 호랑나비라는 노래 하나로 [[가요톱10]]에서 골든컵을 수상했으며, 이후 그가 마르고 닳도록 예능에서 우려먹는 '10대 가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어린이 영화 [[반달가면]]으로 [[심형래]]와 함께 어린이계의 아이돌 자리에도 당당히 오르기도 했다. 이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시작하면서 예능인으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다. [[https://youtu.be/qsLS-MNXs9A|흔들흔들]] 그 당시에 분장 자체가 꽤나 파격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타잔]] 복장을 하고 노래를 불렀다.[[https://youtu.be/8yhxQigYYms|#]] '호랑나비'와 같은 앨범에 수록된 후속곡으로 '흔들흔들'도 [[나름]]대로 히트를 쳤으며 이게 그의 몇 안 되는 CF 출연의 소재가 된다. 바로 삼립식품에서 런칭한 '''흔들흔들바.''' [[https://www.youtube.com/watch?v=ZLSz016ziM0|광고 영상]] 호랑나비와 관계된 후일담이 있는데 원래 이 노래는 김흥국을 위하여 작곡된 노래가 아니었다. '논개'로 유명세를 탄 이동기가 1985년 발표하였는데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고 이후 김홍경이란 가수가 1987년에 리메이크하였다.[* 참고로 김홍경은 90년 초반 신문에서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다고 나왔다.] 하지만 두번 모두 알려지지 못하고 묻혔던 곡을 김흥국이 리메이크하자 비로소 알려졌다. [[https://www.youtube.com/watch?v=DSHDkTABKdw|59년 왕십리]] 1992년 다음 앨범에서 '59년 왕십리'를 발표했는데 호랑나비와는 달리 제법 세련되고 '''지극히 제대로 된 콘셉트'''의 명곡이어서 꽤 호평을 받았다. 어느 정도냐면 이 노래를 처음 접하는 사람 중에는 김흥국 노래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정말 김흥국이 부른 게 맞냐?"는 반응도 있을 정도다. 물론 김흥국답지 못한 노래라고 까는 컬티스트들도 존재한다. 물론 이 노래도 처음부터 김흥국이 부른 노래가 아니다. 원래는 가수 김남화[* 후에 김재희라는 예명으로 소양강 처녀의 리메이크곡을 발표했으며 애증의 강 등 몇몇 히트곡을 남겼다.]가 1987년에 '왕십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노래로, 김흥국의 곡과 비교하면 가사 일부가 다르다. 이 곡은 스테디셀러의 표본이기도 한데, 가요톱텐의 10위 안쪽을 히트곡이라고 판단하던 그 당시에는 히트곡으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왜냐면 15~30위권에서 몇달을 버틴 노래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성적은 빌보드 연말차트로 환산하면 연말 순위 20~30위 정도는 충분히 된다. 짧게 1위를 했던 노래들의 취급이 이 정도이니 얼마나 가늘고 길게 갔는지 알 수 있다. 동년도에는 한국-미국-프랑스 합작 애니메이션 <털보아저씨와 꾸러기들>의 주제가를 불렀다. [[https://youtu.be/pspuygS_gIU|내게 사랑이 오면]] 59년 왕십리에 이어서 1993년 김흥국은 '''또 멀쩡한 노래이자 몇 안 되는 히트곡'''인 '내게 사랑이 오면'을 발표한다. 골든앨범을 제외하면 4집 타이틀곡이지만, 트로트이자 멀쩡한 노래라서 인터넷 사용층에게는 인지도가 떨어진다. 이렇게 노래들로 다시 한 번 히트를 치고 베스트 앨범까지 내면서 1993년까지 가수 인생 최절정기를 달리던 도중, 1993년에 [[김건모]]의 [[레게]]곡 '[[핑계(김건모)|핑계]]'가 큰 인기를 끌자[* 당시는 가수들이 [[레게]]곡을 많이 냈던 시기로, 레게 그룹을 표방했던 닥터레게는 1993년, [[룰라]]도 1994년에 데뷔했다. 투투도 데뷔 당시 레게 음악으로 했다.] 나도 레게곡으로 한 번 떠보자며 '성인들을 위한 레게 음악'을 모토로 타이틀곡으로 '레게 파티'를 내세운 앨범인 Last Reggae를 1994년에 내놓게 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때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곡을 공개하고 차트인 할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제작자가 갑자기 잠수타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져 결국 음방 한 번도 못나가고 시작도 제대로 못하고 끝나버렸다.] ||[[파일:external/cmsimg.mnet.com/36982.jpg|width=350]]||[[파일:레게의神김흥국.jpg]]|| || 1994년 Last Reggae || 2017년 레게의神 || [[https://youtu.be/c7AtdWmJzbI|레게 파티 첫 시연 당시]] [[https://www.youtube.com/watch?v=JoJDrTILSNM|레게 파티2]] 당시 앨범 재킷에 터번을 쓰고 춤을 추는 사진을 걸어 향후 무식개그로 한 획을 그을 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레게]]는 [[자메이카]]의 음악이지만. 참고로 이 '레게파티'에서 랩 파트를 피처링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룹 [[룰라]]의 리더 [[이상민(룰라)|이상민]]'''이다. 물론 이때는 듣보잡 신인시절인지라 앨범에 피처링 이름도 올리지 못 했다.(재발매반에서는 올림) 여담으로, 당시 앨범발표 직후 [[일밤|일요일 일요일 밤에]] 등에서 홍보를 했는데 위 앨범자켓과 동일한 중근동 스타일 복장에 신발은 중고등학생들이 신고 나오는 실내화를 신고 나왔다. '왜 실내화를 신으셨죠?'라고 진행자가 묻자 '의상비용 지출을 너무 많이 해서 신발에 쓸 돈이 안 남았다' 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렇게 당시에는 시원하게 망했지만. 그럼에도 레게 컨셉과 장르만큼은 제대로였다는 평과 함께 후에는 '''컨셉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시대를 앞서간, 내지는 시대를 잘못 만난 노래"로 [[재평가]]되었다.''' 실제로 쿤타, 스컬, 하하 등의 2000년대 이후 활발하게 활동 중인 현역 레게 가수들 사이에서도 레게파티에 대한 평가는 좋은 편이다. 결국 이 음반은 한참을 지나 2016년이 되어 [[비트볼 레코드]]에서 카세트 테이프와 10인치 바이닐로 복각발매되었다. 그것도 새로운 커버와 함께 발매되었다. 여담으로 레게파티의 킬링파트 부분인 기살어 기살어 이후 혀를 낼름거리는 파트는 엄청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가수라고 하는데 히트곡 중에서 '''59년 왕십리'''와 '''내게 사랑이 오면'''를 제외한 노래는 괴이하다 못해 [[전파송]]에 가깝다. 자작곡 '정아'나 본인의 경험담이 담긴 '59년 왕십리'를 보면 1절과 2절이 똑같다고 까일지언정 그렇게까지 음악적 능력이 없는 가수는 아니다. 첫 히트곡 호랑나비가 워낙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노래다 보니 이미지가 그쪽으로 굳었고 이후 발표한 곡들이 호랑나비 만큼 히트를 치지 못하자 계속 B급 감성의 코믹 댄스곡으로 밀다가 망가진 경우다.[* 레게파티와 1995년에 나온 후속 앨범 '2002 월드컵 코리아' 이후에 '무정'이라는 트로트 앨범을 다시 내긴 했는데 워낙에 이미지가 훅 가버려서 돌이킬 수가 없었다.] 사실 레게파티 이후로도 김흥국은 월드컵용 싱글과 기존 대표곡에 신곡 한 두곡을 추가하는 형태일지언정 꾸준히 앨범을 내고 있으니 '''현역 가수'''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몇몇 트로트 곡들이 중장년층에게 인지도가 살짝 있는 것을 제외하면, 김흥국의 노래는 월드컵 시즌에도 반향을 못 일으키는 것이 현실일 뿐. 뭐 가수로서는 망가졌으나 아래 서술할 예능부분을 보면 예능에서 성공했으니 다행일지도 모른다. 꼭 가수의 길에서 계속 인정받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보컬 능력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개그맨 이미지를 감안하고 보면 의외로 괜찮다는 평이 꽤 나오지만, 상반되는 의견을 피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정찬우]]가 (예를 들어 [[두시탈출 컬투쇼|컬투쇼]] 2015년 2월 10일, 2월 17일 방송에서처럼) 농담반 진담반으로 "형님 노래 못하신다"고 종종 언급하곤 하지만, 애초에 드러머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후에도 가수로서 순수하게 가창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경우는 없었다. 다만 김흥국 특유의 허스키한 중저음 음색에 대해선 다수가 호평을 하는 편. 가창력 논란하고는 별개로 수십년 동안 음악 물을 먹은 사람답게 가요계의 동향에 밝은 편이다. 김흥국의 라디오 방송을 유심히 들어보면 흘러간 노래나 왕년의 유명 가수, 작곡가들에 대한 정보가 상당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워낙 인맥도 넓은 사람이라 요즘은 소식을 접하기 쉽지 않은 가수들의 근황을 전해주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yjnFS484ibo|독도로 날아간 호랑나비]] 2015년 8월 26일 인순이를 제치고 남진, 송대관, 태진아에 이어 임기 3년의 가수 협회장에 당선되었다. 쇼미더머니5에 길 팀의 보이비의 무대에 [[https://youtu.be/1C1DAva2Tw0?t=227|특별출연]]하였다. 말 한마디 안 했지만 무대 출연 자체로 사람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GtcpKEJusNw|원샷]] 2016년 6월에 김흥국, [[VIBE|바이브]]가 부른 원샷이라는 노래가 공개됐다. 2019년, [[자메즈]]의 [[https://www.youtube.com/watch?v=Jp3srSY5N_Y|09년 왕십리]]에 피처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