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가사키시 (문단 편집) == [[뉴클리어 아포칼립스|원자폭탄 피폭]] == 나가사키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도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피폭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흘 전 [[히로시마시]]에 투하된 [[리틀 보이]]보다 '''더 강한 "[[팻 맨]]"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다.''' 자세한 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참조. 하지만 묘하게 히로시마시에 비해 이쪽으로는 이미지가 좀 약하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편. 피해 인구가 하술하듯 히로시마의 절반이었고, 원폭에 맞은 사람 중 [[몰살|생존자가 하나도 없어서]] (즉, 피폭 생존자 수가 적어서) 그럴 가능성이 크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 [[히로시마시]]의 15Kt급 리틀 보이보다 더 강력한 22Kt급 팻 맨이 투하되었는데도, '''히로시마의 사망자 추산 14만 명의 절반인 7만 정도가 사망'''했다. 그 원인은 나가사키 자체가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가 많은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천후에 의한 시계 악화로 인해, 사수가 시가지가 보이는 즉시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게 우연히도 거의 [[분지]]에 가까운 '''산에 둘러싸인 곳에 떨어져,''' 폭발 후 열선과 후폭풍이 산을 넘지 않아 폭심지 근처로 피해가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지금과 달리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역 내 인구는 히로시마가 34만명, 나가사키가 25만명 남짓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1순위 후보였던 [[코쿠라시|코쿠라]](시계 악화로 핵투발에 실패)가 17만인데다가 반경 10km 내에 모지(14만 명), [[야하타]](26만 명), [[토바타]]와 [[와카마츠시|와카마츠]](각 8만 명), [[시모노세키]](20만 명) 등 대도시가 몰려 있어 수십 만의 희생이 예정되었다가 모면한 셈이다. * '''원래 나가사키는 폭탄 투하 후보 중 3순위였다.''' 그리고 나가사키 폭탄 투하 당일, 팻 맨을 실은 폭격기가 원래 목표로 한 곳은 발전소 등이 있는 [[후쿠오카현]] [[코쿠라시]](현재의 [[키타큐슈시]] [[코쿠라키타구]], [[코쿠라미나미구]]). 그러나 작전 당일 [[큐슈]] 전체가 날씨가 좋지 않아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고[* 고쿠라 상공을 덮고 있던 이 연기에 대해서는 [[2014년]]에 새로운 설이 제기되었다. 히로시마시 폭격 이후, "B-29 한두 대가 날아오면 도시 하나를 날려버리는 특수폭탄 폭격이다."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져나가고 있었고, 코쿠라에는 제철소와 무기 공장 등도 있어서 "다음은 우리 차례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8월 9일 아침 소규모의 B-29들이 코쿠라로 접근한다는 얘기를 들은 야하타시 제철소에서 직원들이 드럼통에 대량의 콜타르를 태워서 연기를 발생시켜 시야를 가렸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은 원자폭탄에 대응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 이전부터 폭격에 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B-29 작전고도는 상공 10km인데, 이 정도는 서울 전역이 내려다 보이는 고도이고, 해당 주장에 따르면 콜타르를 태워 '''서울시 전역에 [[연막탄]]을 뿌린 것'''과 같은 효과를 냈다는 것. 당연히 그럴 수는 없고, 열악한 기상 상황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초계기와 정보수집기의 삽질로 투하 지점, 그러니까 코쿠라시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하면서, 폭격기는 어쩔 수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보고 작전 시간에 맞추어 코쿠라시 상공으로 진입했다. 그렇게 1시간여 경과. 핵폭탄 발사 준비원이었던 미 해군 중령 프레더릭 애시워스는 나가사키의 시야가 확보되지 못할 경우, [[레이더]]를 이용해 원폭 투하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거짓말 같이 몇 초 간 하늘이 개이자, 연료 부족으로 폭격기는 핵폭탄을 투하했다. 이게 불과 투하 1시간 전의 이야기니, 즉 이 1시간 사이에 나가사키와 코쿠라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야훼|천주님]]이 우리를 버렸어~~ 사실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하러 가던 조종사들은, 천주의 도움을 받기 위해 기지에 있던 군종신부 조지 자벨카의 축복을 받고 출격했다.[* 조지 자벨카는 히로시마 원폭 때도 조종사들을 축복했는데, '''자기가 축복한 병사들이 부순 게 대성당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후 일본에 방문했지만, 히로시마는 갔어도 나가사키는 갈 용기가 나지 않아 안 갔다고 한다. 갔다면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 나가사키 폭격에 대해 [[미국]]과 [[일본]]의 [[일본 극우사관|극우]]는 의외로 같은 소리를 한다. 당시 원래 폭격 목표였던 코쿠라 시의 경우 히로시마와 동일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예정대로 코쿠라 시가 피폭당했을 경우 피해가 1차 피폭지였던 히로시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 8월 15일은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승천대축일]]이고, 당시 일본 [[가톨릭]] 교회에는 성모승천대축일에 앞서 [[판공성사]]를 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라운드 제로]](원폭 투하지점)에서 불과 7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대성당[* 당시 동양 최대의 성당이자 나가사키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기도 하였다. 위에도 설명했지만 나가사키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일본 최다인 곳이다.]에서 [[미사]]&[[판공성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성직자)|사제]]와 24명의 신자가 즉사했고, 8천 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원 사망하였다. 성당은 당연히 전소되었고 그 열화 속에서 [[성모]]상이 다른 부분은 타서 없어지고 머리 부분만 발견되었는데, 후에 재건된 성당에서 이 두상을 "원폭의 성모님"으로 모시어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나가사키에서 원폭은 '천벌', 원폭 희생자는 '속죄양'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히로시마와 다른 점이다. 나가사키 의대 교수였던 [[나가이 다카시]]의 책과 그의 자택인 뇨코지(여기당)[* 나가이 교수도 아내의 영향을 받아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원래는 신자가 아니었지만, [[카쿠레키리시탄]]의 후예였던 아내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귀의했다), 여기당의 이름 역시 '네 이웃을 네 몸 처럼 사랑하라'(마 12:31)의 한역인 여기애인(如己愛人)에서 유래했다.]의 기념관에 잘 나타나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오우라 성당은 국보가 되고 세계유산이 되었는데, 우라카미 성당(재건 후는 더 이상 대성당의 규모가 아니다)에서 내세울 건 위의 성상들 뿐이다. * 당시 나가사키시에 수용됐던 연합군 포로들 중 일부가 이 때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작 배우 [[휴 잭맨]]이 주연인 [[더 울버린]]에서 연합군 포로로 잡힌 울버린이 피폭되는 장면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만든 것. * [[나가사키 평화공원]]을 세워서 원폭의 위험성을 알려주고 있다. * [[송해]]는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이곳에서 온 일본인에게 "아, '''그 핵 떨어진 곳?'''" 란 돌직구를 날려서 사람들에게 [[충공깽]]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사실, 송해는 이 사건이 터질 당시 18세였다. 하지만 실제 저 발언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