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단 편집) =====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 [[1920년]] 소련은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순차적으로 침공하여 [[아르메니아 SSR]]과 [[아제르바이잔 SSR]]을 설립한다. 소련은 두 민족의 영토 분쟁을 틈타 이 두 나라를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자신의 것이 되었을 때 그 관할 영토를 중재하는 데 있어서는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아르메니아SSR이 설립된 첫 날인 1920년 12월 3일, 바쿠로부터 나고르노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을 아르메니아 땅으로 인정한다는 전문이 날아온다. 이는 레닌 시대 소련의 이념인 공산주의 동무들 사이에 국경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선전하는 한편 아르메니아가 볼셰비키를 호의적으로 대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오시프 스탈린]]과 그의 신임을 받는 아제르바이잔 볼셰비키 지도자였던 내리만 내리마노프(Nəriman Nərimanov)의 생각은 달랐고, 아제르바이잔 SSR은 이 전문을 곧바로 부인하며 세 분쟁지역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재확인한다. 1921년 6월 12일 러시아 공산당 캅카스 지국에서는 "아제르바이잔 SSR 혁명위원회의 결정과, 아제르바이잔 SSR 및 아르메니아 SSR의 동의에 따라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SSR에 통합시킨다."라는 결의안을 채택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영토 분쟁 해결 방식은 이러하였는데, 일단 분쟁이 발생한 지역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부여하고 지역 인민위원회를 소집해 이들의 투표로 분쟁을 결론짓는 것이었다. 이 결의안 채택 과정에 배석해 있던 아제르바이잔 SSR 대표 중 한 명인 내리마노프는 이에 격분하여 이의를 제기하고, 7월 4일에 중앙위원회를 개최해 투표로 결정하게 된다. 1921년 7월 4일 열린 회의에서의 투표 결과는 이전의 결의안과 마찬가지로 아르메니아 SSR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아제르바이잔 SSR 대표 내리마노프는 이에 다시 불복하며 이 사안을 캅카스 지국에서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로 이관할 것을 요구한다. 캅카스 지국은 이에 동의했고 다음날인 7월 5일, 와병 중이었던 레닌의 대리로 스탈린이 참석한 가운데 트빌리시에서 회의가 다시 열렸다. 7월 5일 회의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하여서는 그 1차 사료가 오늘날까지 공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표결이나 번복 사유에 대한 설명 없이 스탈린의 의견에 따른 공산당 성명문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Proceeding from the necessity for national peace among Muslims and Armenians and of the economic ties between upper [mountainous] and lower Karabakh, of its permanent ties with Azerbaijan, mountainous Karabakh is to remain within the borders of the Azerbaijan SSR, receiving wide regional autonomy with the administrative center at Shusha, becoming an autonomous region.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국가적 평화 및 아제르바이잔과 영구적인 관계를 갖는 카라바흐 고지대와 저지대의 경제적 유대의 필요성에 따라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SSR의 영토로 잔류하며,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받아 슈샤에 행정 중심지를 둔 자치구역이 된다. 공식적으로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이 괴상한 중재를 두고 당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양쪽의 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견해가 있다. 튀르키예와의 우호관계 확립, 반볼셰비키적 성향[* 아르메니아 SSR 설립 직후인 1921년 2월 18일 볼셰비키 정권에 대한 반발로 제1공화국 관료와 군부가 반소 폭동을 일으켜 예레반을 점거하고 독립을 선포한 일이 있었다. 같은 시기인 3월 16일 소련은 모스크바에서 튀르키예와 우호조약을 체결하였고, 반란은 4월 2일 증원된 붉은 군대가 예레반에 재입성하면서 진압되었다.]을 보인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우평균, ''나고르노 카라바흐(Nagorno-Karabagh) 분쟁의 갈등 양상과 국제 개입''중 "II-1.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관할권 결정 과정"(민족연구, 2013), 97.] 순순히 말을 듣지 않는 아르메니아SSR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한 월경지의 인질화, 아제르바이잔의 불충에 대비한 내부의 "제5열" 기도[* The Armenia-Azerbaijan conflict : causes and implications by Croissant, Michael P., p.19~20, 1998] 등 당시 시대 정황을 반영한 다양한 견해 중 무엇이 사실과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는 회의 관련 1차 사료에의 접근이 오늘날까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명확히 규명할 수 없다. 어쨌든 이러한 결정은 아제르바이잔의 대승리이자 아르메니아의 대패가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굉장한 불만을 가졌겠으나 스탈린 시대에는 관련 정치인들이 죄다 숙청되면서 공식적인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였다. 아르메니아측의 공식적인 반발은 스탈린의 철권통치가 해빙기를 맞는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에 시작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명목상 아제르바이잔에 속해 있었으나 소련 최고 소비에트의 중재가 없으면 본국인 아제르바이잔의 지시를 거의 따르지 않으며 독자적으로 행동하려 하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1963년, 1965년, 1975년, 1977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아제르바이잔과 소련이 자신들의 거주지역에 투자를 하지 않고 토착기업들을 빼앗아 간다는 내용의 탄원을 넣었지만 이는 모두 무시되었다. 이 시기가 되면 시베리아 유전 개발로 아제르바이잔 또한 모스크바의 관심이 시들어 가며 경제적으로 쇠락하기 때문에 꼭 아제르바이잔이 일부러 그랬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어쨌든 이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들은 대개 돌집을 짓고 외국인노동자 생활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하는 궁핍한 삶을 살았다. 그리하여 아제르바이잔 치하에서의 민족적 컴플렉스와 경제적 박탈감은 이들의 독립 욕구에 부채질을 했다 할 수 있겠다.[* Gha-ra-bagh! by Mark Malkasian, p.25~26,199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