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고르노카라바흐 (문단 편집) ==== 러시아 제국 치하 ==== [[1804년]]부터 [[1813년]]까지 발발한 러시아-페르시아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 제국은 [[1805년]]에 카라바흐 칸국을 사실상 점령했다. [[1813년]] 전쟁의 결과로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됐다. 이 강화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상실했다. [[1822년]]에 카라바흐 칸국과 다섯 소왕국은 해체돼 러시아령 캅카스 부왕령의 옐리자벳폴 현으로 편입됐다. 이 시기 캅카스의 인구구성은 외부세력의 개입에 의해 여러차례 뒤바뀌었다. 중세에 튀르크인이 캅카스 이남으로 이주하면서 해당 지역은 원주민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유목민인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뒤섞여 사는 곳으로 바뀌었다. 예를 들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속한 슈샤(Şuşa)는 원래 아르메니아인들이 드문드문 거주하는 황폐한 지역이었으나 카라바흐 칸국이 새로운 수도로 건설한 도시였다.[* 당시에는 패나하바드(Pənahabad)로 불렸다.] 이 도시에는 아제르바이잔계, 아르메니아계, 쿠르드계가 공존했다. 또한 오늘날 아르메니아 수도인 [[예레반]]은 튀르크계, 페르시아계 무슬림이 과반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하거나 도시에 거주했고, 아르메니아인들은 주로 농촌에 거주했다. 물론 이러한 공존은 긴장 상태를 수반했다. 카라바흐 칸국의 지배세력인 아제르바이잔계와 피지배세력인 아르메니아계가 서로 충돌을 벌였고, 그 결과 18세기 말에 이르러 카라바흐 일대는 아르메니아계가 오스만 제국 등 다른 지역으로 피난하여 급격히 공동화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캅카스 이남을 정복하자, 다른 지역으로 피난했던 아르메니아계가 다시 카라바흐 일대로 재이주하였다. 동시에 아제르바이잔계가 이란 등지로 피난하여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계 비율이 다시 높아졌다. 예를 들어 1836년 러시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속한 슈샤의 인구는 시아파 무슬림이 남성 3175명, 여성 3196명, 도합 6371명이었으며,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남성 3133명, 여성 3222명, 도합 6355명으로 거의 1:1 비율이었다.[* 위 수치는 Акт, Собранные Кавказской Археографической Комиссией, Tom 2, No: 1437, Tbilisi, 1868를 재인용함.] 카라바흐 칸국을 무너뜨린 캅카스 총사령관 알렉세이 예르몰로프(Алексей Петрович Ермолов) 러시아 제국 육군 보병대장이 1823년에 수행한 카라바흐 지역의 인구조사에서도 총 20,095가구가 거주하는 해당 지역에서 15,729가구(78%)가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이며, 4,366가구(22%)가 아르메니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 수치는 Описание Карабахской Провинции, составленной 1823 году, Тифлис, 1866를 재인용함.] 이 조사에서도 슈샤는 27.5%(421명)만이 아르메니아인이었고, 나머지 72.5%(1,111명)는 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하지만 50년 뒤인 188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슈샤 인구의 56.7%(15,188명)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이전 문서 내용은 1836년 러시아 인구조사 결과를 토대로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인 다수 지역이었다고 서술했으나, 해당 인구조사는 '''카라바흐 전 지역''', 즉 쿠라 강과 아라스 강 사이를 일컫는 보다 넓은 영역을 대상으로 치룬 것이다. 오늘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영토 분쟁을 벌이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대, 즉 카라바흐 서부의 산악지대는 여전히 아르메니아계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함레트 사르키샨(Համլետ Սարգսյան)에 의하면 1823년 당시 나고르노카라바흐에는 36,500명이 거주했으며, 이 중 84.6%(30,800명)는 아르메니아인, 14.7%(5,400명)는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인), 0.7%(300명)는 쿠르드인이었다.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농촌 주민 28,200명 중 97.5%(27,500명)는 아르메니아인, 2.5%(700명)는 타타르인(아제르바이잔인)이었다.[* 위 수치는 Население Нагорного Карабаха за 100 лет(1823-1923 гг.), 2016을 인용함.] 물론 계속돼 오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간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졌다. 제정 말기였던 [[1905년]]부터 [[1906년]] 동안 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 학살(Հայ-թաթարական ընդհարումներ / Erməni-azərbaycanlı qırğınları)[* 해당 사건은 러시아어로는 '아르메니아인-타타르인 학살(Армяно-татарская резня)'이라고 하는데, 당시 러시아어로는 아제르바이잔인을 자캅카스 타타르인(Закавказские татары)으로 지칭했기 때문이다.]로 불리는 조직적인 학살과 무력충돌이 상호 간에 자행됐다. 최종적으로 러시아측이 [[카자크]] 기병을 비롯한 병력을 투입해 소요사태를 진압했다. 하지만 [[러일전쟁]]의 패전과 연이어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당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던 러시아 중앙정부는 이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은 1920년대에 국가를 건국하기 이전부터 이미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상태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