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막신 (문단 편집) == 역사 ==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74014&cid=40942&categoryId=32094|두산백과(나막신)]] 우리나라의 나막신은 크게 '판자형(板形)'과 '선형(船形)'으로 나눈다. 판자형은 'ㅡ' 또는 'ㅠ' 모양 나무판자에 끈을 달아 발가락 사이로 걸어 신는 방식이고 선형은 갖신 처럼 발을 감싸 넣어 신는 방식이다. [[파일:청진지구 유적 조선후기 나막신.jpg]] 언제부터 형태가 변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나막신 유물 중에서도 쌍북리 [[백제]] 유적과 경기도 안성 [[통일 신라]] 죽주산성 유적에서 금동 신발과 상당히 유사하게 나무를 파 발을 넣을 수 있도록 갖신 모양으로 만든 성형 나막신 또한 발굴했다는 점과([[https://blog.naver.com/dnpdlem13/221794698593|삼국시대 신발들]]) [[조선]] 후기 나막신 유물 중에서도 청진 12~16지구 유적에서 구멍 3개가 뚫린 '''ㅠ''' 모양 판자형 나막신을 발굴했다는 점으로 볼 때[* 해당 유적에서 발굴한 나막신은 판형 25점, 선형 7점이라고 한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판자형, 선형 두 가지 형태 나막신을 혼용하다가 점차 갖신 형태인 선형 나막신이 좀 더 대중화한 것으로 보인다. || [[파일:백제 나막신 끈.jpg|width=100%]] || [[파일:신라 나막신 끈.jpg|width=100%]] || |||| [[http://www.koreascience.or.kr/article/JAKO200571663777619.page?&lang=ko|출처 - 한·중·일 삼국의 고대 나막신 연구(국립문화재연구원)]] || [[백제]]와 [[신라]] 유적에서 발굴한 나막신들을 보면 서로 비슷한 구조를 띄고 있지만 구멍 갯수나 끈을 묶는 방법으로 추정할 수 있는 양식에서 약간 차이를 보인다. 구멍은 3개, 5개, 6개, 9개로 다양하며 여기서 예시로 들 나막신의 경우 백제의 것은 구멍이 3개로 일본 나막신인 게다와 동일하지만 신라의 것은 구멍이 5개라서 크게 두 가지 설로 나누고 있다. 방법 1은 [[신라]]의 [[짚신]] 모양 이형 토기[*사진 [[파일:신라 짚신모양 이형토기 1.jpg]] [[파일:신라 짚신모양 이형토기 2.jpg]]]의 끈 부분을 보고 이와 비슷하게 추측한 모양이며 방법 2는 [[백제]]의 것과 비슷하게 신고 벗기 편한 슬리퍼 형태로 추측한 모양인데 둘 다 맞을 가능성도, 둘 다 아닐 가능성도 있다. 끈 부분이 남아있는 유물이 없어 정확히 어떤 형태인지는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다. 또한 조선 후기 판자형 나막신 중에서도 구멍이 3개인 유물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백제와 신라에서도 특별히 정해진 규칙 없이 실용성 면에서 구멍 3~9개 나막신을 서로 혼용했을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제작 재료로는 소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등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들을 다양하게 활용했지만 우리나라의 환경 요소와 재료 특성을 고려하여 소나무를 가장 많이 이용했다고 한다. [[http://www.imwood.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218|조선시대에 사용된 나막신은 무슨 나무로 만들었나요?]]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84119|종로 청진 12~16지구 출토 나막신의 수종분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