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석주 (문단 편집) == 생애 ==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남지리에서 나병헌(羅秉憲)[* 1909년 서북학회(西北學會) 재령군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http://db.history.go.kr/id/ma_004_0170_0390|#]]]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125년간 나석주의 [[가문]]이 소유한 [[토지]]였는데 기름진 땅이라 농작물이 무럭무럭 자랐으며 나석주 역시 어릴 적부터 집안의 [[농사]]를 돕고 살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세워지면서 나석주의 집안은 땅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일제의 지독한 수탈에 한 가족이 1년을 먹기도 힘들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자 격분한 나석주는 재령군사무소로 따지러 갔지만 일제는 콧방귀를 끼며 땅을 강제로 빼앗아 [[일본인]]에게 양도했다. 이 사건으로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농부를 때려 치운 뒤 명신학교를 수학하고 북[[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에서 항일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때 군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다. 황해도 [[평산군]]에서 주재소 일본 경찰과 면장을 사살하고 북쪽 지방 일대를 돌아다니며 요인 [[암살]]과 군자금을 모으고 다녀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에 일제는 나석주를 잡기 위해 [[군대]] 병력을 증강시켰는데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나석주는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비 담당으로 일하였다. 이후 국내에 돌아와 의거할 기회만 노리던 나석주는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창숙]]의 요청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임무를 부여받고 [[중국인]] '리중거'로 위장하여 입국하게 된다.[* 연이은 [[의열단]]의 의거로 항구에 경비가 삼엄하여 6개월간 입국 타이밍을 보았다고 한다.] [[파일:1927.1.13 동아 號外 (1).jpg|width=500]] 한동안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중국인 거주지에서 중국인 행세를 하며[* 6년 이상 중국에 체류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임무를 못 해보고 [[중국어]]만 늘었다고 자조 섞인 한탄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했다.] 기회를 엿보던 나석주는 거사일인 1926년 12월 28일 [[권총]]을 신문지로 감싼채 겨드랑이에 끼고 폭탄을 지닌 채로 [[명동]]으로 향했고 [[을지로]] 일대를 휘저은 거사를 일으켰다. 먼저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사[* 현재 [[하나은행]] 을지로2가 본점 자리.] 로비에 들려 중국인 행세를 하며 경비 태세를 탐문했다. 이후 맞은편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전 이름은 농공은행(農工銀行)으로 1918년 농공은행 지점이 통합하여 식산은행이 되었다. 주요 업무는 일본인들의 사업자금, 일본인들의 식민지 정착을 위한 농토 구입자금공급 등이였으며 특히 20년대 [[산미증식계획]]에서 각종 수리자금이나 총독부대행 수탈책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현재 [[롯데백화점 본점]] 자리.]에 들러 연말이라 사람이 바글바글[*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가 [[사망]]하여 임시 [[공휴일]]이 지정되었던 것도 한몫했다.]한 틈을 타 정신없이 은행 업무를 보던 [[은행원]]들 뒤로 폭탄을 투척했다. 하지만 폭탄은 불발되었고[* [[합법]]적으로 [[무기]]를 소지할 수 없는 [[신분]]상 폭탄 반입은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는데, 당연히 폭탄들이 제대로 관리가 될 리 만무했고 때문에 폭탄이 습기를 먹는 등 고장나는 일이 적지 않았다.] 놀란 직원들과 사람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 앞으로 몰렸다. 하지만 나석주는 태연하게 "아. 쓰미마셍."하고 조선식산은행 밖으로 자리를 떴고 후에 은행 직원이 폭탄임을 깨닫고 [[종로]] [[경찰서]]에 신고했다. 거리의 사람들이 조선식산은행으로 몰리자 상대적으로 경비가 한산해진 건너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가서 신문지로 숨겼던 권총으로 1층 수위실의 일본 [[기자]]부터 사살했다. 직후 2층 사무실을 돌아다니면서 동양척식주식회사 직원들을 권총으로 사살했는데 먼저 총소리를 듣고 계단을 올라오는 직원 1명을 사살했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가서 오모리 차장과 아야다 과장을 사살했으며 옆 기술과로 들어가 권총을 마구 [[난사]]하고 폭탄 1개를 던진 다음 아래층 현관에 있던 일본인 2명에게 권총을 쐈다. 살육전을 벌이다보니 시간이 생각보다 지체되었고 [[탈출]]할 때가 됐다고 느낀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나와 거리를 내달렸지만 출동한 일본 경찰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나석주는 먼저 만난 [[경기도]] 경찰 경부 [[다하타 유이지]]를 사살하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인들을 사살하며 도주했다.[* 당시 총을 3발을 발사했다.] 그러다 체력이 다했다고 느꼈는지 [[전봇대]]에 기대어 가슴에 총을 쏴서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당시 22발이 남았었다고 한다.] 고등계 형사로 악명이 높았던 미와의 심문을 받던 중 자신이 나석주임을 밝히고 순국했다. 사망 후 나석주의 유해는 가족들이 [[서울]]로 와서 인수해 고향인 황해도 재령군의 묘지에 매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