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선정벌 (문단 편집) === 샤르후다의 2차 토벌 === 결국 청나라는 1658년 대규모 토벌을 다시 계획한다. 이전 토벌에서 큰 전공을 올린 샤르후다를 총지휘관으로 선임했고, 이번에도 조선에 파병을 요구해 포수를 지원 받았다. 파병된 조선군의 지휘관으로는 혜산진첨사 [[신유(장군)|신유]]가 임명된다. 신유가 이끈 포수들은 지난번 1차 나선정벌 때의 2배인 200명이었다. 그러나 이전 정벌 보다도 더 착실하게 준비한 것에 비해 샤르후다의 2차 정벌은 시작부터 뭔가 순탄치 않고, 온갖 기이한 일이 생겨 큰 방해를 받게 된다. 당장 조선군을 안내할 청나라 통역관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고, 통역관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비한 조선군은 발을 맞추려 급히 행군하느라 도중에 말이 쓰러저 죽고 물자는 진흙탕에 빠지는등 온갖 고생을 하며 간신히 5월 6일에 가서야 닝구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간신히 닝구타에 도착한 신유는 그대로 샤르후다와 합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샤르후다는 이미 출동한 상태라 제대로 지휘를 받을 수 없었다. 신유는 적에 대해 제대로 설명도 못 받고, 그저 아무르강과 송화강 근처의 [[오랑캐]](왈가, [[나나이족]][* 허저(赫哲, 혁철)족이라고도 한다.])들의 정세를 궁금해하며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은 5월 10일에 가서야 샤르후다의 주둔지로 행군할 수 있는데 이 행군길도 비가 잔뜩 내려 피곤하기 짝이 없었다. 조청 연합군은 왈가족 사공이 모는 왈가족 배를 징발해 송화강 어귀까지 이동했는데, 5월 15일에 가서야 도착했다. 5월 14일 왈가족 사람 4명이 청군과 조선군에게 러시아군이 아무르강 어귀에 도착했음을 알렸는데, 이때 러시아군과의 전투에 투입될 선박이 미처 준비되어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북경, [[선양시|선양]], 닝구타에서 장수들이 파견되고 선양에서 지원군이 오며, 북경에서는 잠수병이 온다 해놓고 막상 현지에 와보니 아무도 안 온 태였기에 신유는 토벌이 틀어지는 것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0일까지 조선군은 그곳에서 머물며 사격 훈련을 진행했다. 이때 나나이족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적군이 조선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보았습니다. 그 일 이후로 도적들은 말끝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두렵다고 했습니다."'''라고 전한다.[* [[신유(장군)|신유]]의 [[북정일기]] 중.] 즉 대두인은 나나이족이 벙거지나 전립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써서 머리가 커보이는 조선군을 부르는 표현이었는데[* 실제로 조선 사람들을 만난 서양인 대부분은 조선 사람들이 쓰는 챙이 넓은 모자가 인상에 깊게 남았던 건지 유독 모자에 관한 내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들과 러시아가 교류하면서 러시아 역시 조선군을 대두인이라 칭하게 된 것. 5월이 다 지나고나서야 청나라의 후속 병력들과 작전에 필요한 선박들이 도착했다. 땟목 120척 타고 작전해야 했던 이전 토벌과 달리, 2차 토벌에선 청나라도 제대로 된 군함을 동원했다. 신유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동원된 전선은 총 42척으로 판옥선이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좀 더 튼튼했으며 지붕이 없고 단청이 매우 화려했다고 한다. 이들 중 대형 함선은 36척이었고 소형 함선은 12척이었다. 코르벳과 케러벨로 구성된 러시아 원정대의 선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규모로, 이전 원정에서 수상 전력 부실로 인해 육상 전투를 벌인 결과, 러시아 원정대가 요새로 도망쳐 틀어박히는 상황이 벌여졌기에 이번에는 아예 수상에서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해 결딴낼 작정을 한 것이다. 샤르후다는 전선 한 척마다 조선 포수를 5명씩 탑승시키고 청나라 갑군을 한 척마다 25명씩 탑승시키는 식으로 부대를 정리한 뒤 6월 5일 진격했다. 갑군은 갑옷을 걸쳐 입고 창칼과 활로 무장했으며, 등패를 보유했다고 한다. 이들은 며칠 동안 나아가 열벌마을에 도달했고, 6월 10일 아침 일찍 마을을 떠났다. 이들은 아무르강 어귀를 지나 20리쯤 가서 러시아 함대와 마주쳤다. 러시아 함대의 규모는 총 전선 11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러시아 범선들은 강 한가운데에 닻을 내리고 있었는데, 조청연합군의 함대가 다가오자 닻을 올리고 돛대를 세워 10리쯤 물러난 뒤 강가에 자리를 잡았다. 러시아군은 그곳에 머물며 지붕 위로 올라가 조청연합군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고, 연합군의 함대는 적선과 한 마장(400m) 정도로 가까워지자 포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러시아군도 응사했다. 이때 청군이 아직 전투에 투입하지 않았던 전선까지 모조리 한번에 밀어넣어 러시아군에게 활, 대포, 작살[* 전투가 끝난 뒤 도착한 다른 러시아 원정대의 보고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피 묻은 작살이 나무에 박힌 것을 많이 발견했다고 한다. 투창이 사용된 듯하다.], 총 등으로 공격을 가하자 범선 위에서 총을 쏘던 러시아군은 버티지 못하고 배 안이나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다. 이에 청 전선들이 러시아 범선들을 포위하고 쇠갈고리를 던져 배들을 끌어당겼고, 포수들이 적선에 올라타 배를 태우고자 했다. 이때 샤르후다는 러시아 배에 실린 많은 물건을 탐내 화공 대신 승선을 명령했다. 조선군이 적선으로 뛰어들었을 때, 그 조선군들이 탑승했던 배의 포수와 사수들 모두가 러시아 배로 옮겨 탔다. 이때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빈 청 전선에 올라타 강가를 따라 상류로 끌고 갔는데, 중국식 정크선을 처음 몰아본 탓에 조종하는 법을 몰라 일부 인원들이 강가에 상륙하여 뱃줄을 잡고 배를 끌고 가는식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만 생각하면 사실 전원 뛰어내려 달리는게 더 좋았겠지만, 청군이 사전에 영곡성 일대를 소개 시키고 청야전술을 펼쳐둔 탓에 보급 부족에 시달리던 러시아 원정대는 선박에 실린 물자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뒤에 있던 배들이 일시에 도주중인 러시아 원정대가 끌고가던 선박을 추격했는데 선두의 배에는 신유가 타고 있었다. 배 여러 척이 러시아군이 탈취한 청나라 배를 포위하자 뱃줄을 끌던 러시아군들이 숲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졸지에 배 위에 갇혀버린 나머지 러시아군은 청나라 갑군들이 뛰어들자 40여 명의 전사자를 내며 전멸했다. 그동안 청 전선 위에 있던 포수와 사수들은 풀숲으로 도망친 러시아군에게 사격을 가했는데, 러시아군이 응사, 청군과 조선군에 사상자가 생겼으며, 또한 화공을 위해 올라탔다가 샤르후다에게 저지당한 포수들 역시 아군 전선으로 돌아간 뒤 배 안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이 튀어나와 연달아 사격을 가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들 중 사망자는 7명으로 이름과 출신은 길주의 윤계인과 김대충, 부령의 김사림, 회령의 정계룡, 종성의 배명장과 유복, 온성의 이응생이다. 이들은 러시아군의 총격에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이후 청나라의 갑군과 사공들에게도 계속 사상자가 나왔는데, 결국 샤르후다는 러시아 함선의 물자를 노략해 보급에 보태려던 생각을 접고, 화공을 가해 러시아 함선 7척을 불태웠다. 이후 청군은 청 전선 3척은 닻을 내리고 적선을 감시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맞은편 기슭에 모이게 하고 밤을 샜다. 샤르후다는 괜히 보급품 다 태워먹었다 러시아 원정대보다 먼저 굶을 생각은 없기에, 기어코 적선 4척만은 태우지 않고 나포하는데 성공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샤르후다의 2차 나선 정벌군의 러시아 원정대 선단 급습은 대성공이었다. 러시아 원정대는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선박도 전부 불타거나 나포당하는 등 그대로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어찌어찌 구한 배 한 척에 생존한 사람들이 탄 채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생존한 군인 중 하나인 페트릴로프스키가 남긴 기록을 통해 피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릴로프스키 보고서에 따르면 스테파노프와 카자크 270명이 전사했으며 차르 [[알렉세이 1세]]에게 바칠 국고 소유의 담비 가죽 3,800장, 대포 6문, 화약, 납, 군기, 식량을 실은 배가 파괴되었으며 겨우 성상을 실은 배 1척에 생존자 95명만 태우고 탈출했다고 한다. 페트릴로프스키가 연합군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화승총과 대포로 무장한 중국 범선 47척이라고 했다. 야전 축성물의 보호를 받으며 러시아 원정대를 요격했던 1차 정벌은 피해가 거의 없었지만 대신 러시아 원정대의 도주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원정대의 도주를 원천 차단하는데 성공한 2차 정벌은 성과는 훨씬 대단했지만, 그만큼 조청 연합군에서도 사상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7명, 중상자는 25명으로 경상자까지 포함하면 상당한 피해를 봤다. 부상자 중 온성 출신의 이충인은 부상이 덧나 사망했다. 조선군뿐만 아니라 청군도 전투에서 총 80여 명이 전사했고 사공 역시 30여 명이 사망한데다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하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샤르후다는 전사자들을 화장할 목적으로 나포한 러시아 함선 1척을 내주었지만, 신유는 거절하고 강가에 매장한다. 전투 당시 조선군은 러시아 함선에서 부싯돌이나 러시아 총 등을 노획했는데, 샤르후다는 러시아군이 보유하고 있던 담비 가죽을 모조리 챙긴 것도 모자라 조선군이 챙긴 총과 부싯돌도 싹 빼앗아 회수했다. 이때 나포한 러시아 함선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유의 표현에 따르면 러시아 범선은 몸체가 크고 갑판 위는 모두 널빤지를 둘렀으며, 배 위에는 방을 세워 두었는데, 넓은 널빤지로 서까래를 만들어 작은 나무 엮은 것을 얹었고, 그 위에 벚나무 껍질을 씌운 뒤 그 위에 또 흙을 깔고 또 두꺼운 널빤지를 덮었기에 '''"살림집도 이만큼 튼튼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한다. 이어 배 위의 집이 이 정도로 튼튼한데 배 또한 바닥이 통나무에 홍이포로 공격해도 잘 부서지지 않는데다 갑판 주위를 두꺼운 나무로 두르고 있어 만약 적이 배 속에 숨거나 육지에 내리거나 하지 않고 끝까지 배 위에서 싸웠다면 승부를 가리기가 만만찮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풀숲으로 도망쳤던 러시아군 10여 명이 빠져나와 조선군과 청군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샤르후다는 이들을 배에 나누어 수용하고는 갑군과 포수들을 시켜 수풀을 뒤져 생존자를 찾아 보라고 명했으나 이들 외에는 모두 총알과 화살에 맞아 말 그대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이때 조청연합군을 안내했던 왈가족과 나나이족은 러시아군의 시체에 칼질을 하며 보복했다. 영곡성까지 오는데에도 큰 고생을 했던 조선의 파병군은 철수할 때에도 곤욕을 치뤄야 했는데, 샤르후다가 사전 통보 없이 조선군의 주둔 기간을 연장해 버리는 바람에 조선에서 가져온 식량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신유는 샤르후다에게 요청하여 [[군량미]]를 빌렸지만, 샤르후다는 조선군이 원래 조선에서 들고 왔던 군량미의 절반 수준만 빌려준다. 여기까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군량미를 옮길 때 부주의했던 탓에, 배에 새어들어온 물에 군량 중 30% 가량이 썩어버렸다. 장작도 충분히 보급받지 못한 탓에 조선군은 떨어질 때마다 청군에게 사정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신유는 끊임없이 청나라 수석 통역관에 러시아 총을 전리품으로 들고 가게 해 달라고 샤르후다에게 요청했는데, 샤르후다는 계속된 간청을 이기지 못해 러시아 총 '''한 자루'''를 내준다. 청군이 노획한 총기는 수백 정이었고 샤르후다는 이걸 전부 챙겨 청나라의 무기고를 불릴 작정을 하고 있었기에 전리품을 내주는데 굉장히 인색했다. 전투가 끝난 시점에서 청군도 보급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2차 정벌에 너무 많은 물자를 동원했고 피해도 상당했던 탓에 뭐라도 잔뜩 챙겨 돌아가지 않으면 곤란해서 1차 정벌에 비해 인색한 대우를 했다. 그래도 모피 따위를 조금 챙겨줄 수는 있었을 텐데 그냥 묵살하고 맨손으로 돌려보낸 것은 너무한 수준이었다. 신유는 당시 러시아 총기가 [[플린트락|수석식]]이었기에 화승 없이 쇠붙이와 부싯돌로 일으킨 불꽃으로 사격하는 모습이 매우 신기하다고 적었다. 조선군은 8월 27일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로서 2차 나선정벌이 종결되고 한동안 러시아 원정대의 패악질이 사라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