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일강 (문단 편집) == 역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집트 필라이.webp|width=100%]]}}}|| || [[아스완]] 근처 [[필라에 신전|필라이 섬의 신전]] || 이름인 '나일'은 '강'이라는 뜻의 고대 [[셈어파|셈어]] 나헬(nahal)에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역시 [[히브리어]]로 강을 뜻하는 나할 'nachal'(히브리어 'נח"ל')의 어원이기도 하다. [[이집트 상형문자|고대 이집트어]]로는 나일강을 이테루(jtrw)[* 현대의 이집트어 표기 관행에 따름. 학계에선 신왕국 전까지는 야트라우/jatɾaw/, 민중이집트어 시기에는 야ㆆ르/jaʔɾ/로 발음했으리라 추정.]또는 하피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냥 '강'이라는 뜻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나일강이 아는 강의 전부였으므로. 이후 이 단어는 크다는 뜻의 '아(ꜥꜣ)[* 원래 아르/ʕaʀ/였다가 민중어 시기 아ㆆ/ʕaʔ/로 발음되었으리라 추정.]'가 붙은 이테루-아(jtrw-ꜥꜣ)의 형태로도 쓰이다가 이것이 [[콥트어]]에서 이아로(ⲓⲁⲣⲟ)로 변형되었는데, 나일강의 경우에는 남성형 정관사 "프"가 붙어 피아로(ⲡⲓⲁⲣⲟ/ⲫⲓⲁⲣⲟ. "The River")라고 불렸다.[* 비슷한 경우로, 강을 지칭하는 [[한자]] '河'는 본래 [[황하]]를 지칭하는 고유 명사였다. 그러다가 낙양 - 장안 지역의 무리한 개발로 토사가 강에 대대적으로 유입된 [[당(통일왕조)|당]] 왕조 이래로 바뀐 강물 색을 따라 '황하'로 불리게 되었다. 중국에 다른 강도 많았으므로 이후 '河'가 강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널리 쓰였지만 원조는 황하라는 이야기. 마찬가지로 '江'자도 원래는 [[장강]](양자강)만을 의미했으나 일반적인 강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가 확장된 글자다. 즉 '하', '강' 모두 river이지만 황하를 황강, 양자강을 양자하로 부르는 경우는 없다.] 나일강은 일반적인 다른 강에서는 찾기 힘든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정기적으로 [[홍수|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의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봄철에 [[에티오피아]]에 폭우가 내리면 5월경부터 청나일강 상류에 [[홍수]]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이 홍수는 6월에 수단 [[하르툼]]에 도달하고 9월 [[아스완]], 10월 [[카이로]]에 도달한다. 11월이 되면 수위가 낮아지면서 갈수기에 접어드는데 갈수기의 수량은 홍수기의 60분의 1에 불과하다. 이런 범람은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강바닥의 진흙은 영양이 풍부해서 조선 시대엔 이를 퍼내서 밭에 뿌리기도 했다. 나일 범람은 그런 천연 비료를 생으로 퍼붓는 것이나 마찬가지.)나일강의 범람 시기는 인간이 확실하게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쪽에 만들고, 강물이 늘었다가 다시 줄어들면 잠겼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쑥쑥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빈 농지에는 다시 홍수가 내려와서 지력을 보충해 준다. 그리고 이런 범람은 다른 이득도 있다. 나일강 유역은 비와 같은 강수량 자체는 적어서 농사를 하려면 물을 끌어다가 쓰는 [[관개]] 농업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관개 농업을 장기간 행하면 지력 소모뿐만 아니라 토지에 [[소금]]이 쌓이는 염해가 발생할 수 있다. 한때 나일강 유역만큼이나 번성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현대에는 사막이 된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나일강 유역은 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면서 이런 소금을 씻어내는 결과가 나와서 염해를 방지할 수 있었다. 이런 농사짓기 좋은 환경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중 하나인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게 되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트모세 4세]]가 군대를 이끌고 최초로 이집트 영역을 벗어나 [[메소포타미아]] 지역까지 원정을 했을 때, 메소포타미아에 도착한 이집트인들이 보고 가장 놀란 것은 '''거꾸로 흐르는 이테루'''였다. 남에서 북으로만 흐르는 이테루(강)만 보다보니,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은 비상식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강의 흐름 방향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세계관에서 아주 중요하다. 북쪽이 위쪽으로 표기된 지도에 익숙한 우리 시대 사람들은 상/하 이집트 개념을 북쪽이 상이집트, 남쪽이 하이집트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나일강 상류에 위치한 남쪽이 상이집트, 하류인 북쪽이 하이집트다. 즉, 나일강이 흐르는 방향은 현대의 나침반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에게는 지리적 방향의 척도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고대 이집트인들의 지리적 방향 개념은 상류 방향(남쪽)/하류 방향(북쪽)의 두 방향뿐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이집트의 지리적 특성상 강 유역은 농업이 가능한 비옥한 땅이지만, 강에서 조금만 멀어지면 거주가 불가능하고 통과도 극히 곤란한 사막이 시작되니, 지리적 차원에서는 동, 서 방향은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이집트 역사에서는 이집트가 메소포타미아와 중동, 아나톨리아 지역까지 지중해 동부 지역과 교류하거나 분쟁을 벌이는 부분이 많아서 착각하기 쉽지만, 실제 이집트 역사 초기의 수천 년간은 실질적으로는 외부와 교류가 없었거나, 그나마의 교류도 역시 나일강 유역을 따라 있는 누비아 지역과의 교류가 많았고, 사막을 건너야 하는(그나마도 거리가 짧은 동쪽 사막이지만) 중동 지방과의 교류는 이미 이집트가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게 된 후기에 주로 있었다. 그 전 수천 년간은 종종 이민족이나 대상의 접근은 있더라도, 단순히 '외부인'으로만 생각하지, 동, 서쪽 지역을 생활 영역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비옥한 땅에 폐쇄적인 환경으로 오랜기간 안정적인 문명을 일군 것 또한 오늘날까지 많은 유물과 기록을 남긴 요인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너무 비약적인 상상이 아닐까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일대를 종으로 관통하는 나일강을 기점으로하면 너무나도 명확하게 동/서, 혹은 최소한 어느 한 기준점을 가진 좌/우의 지정은 절실하다. 그저 강 건너라고 하기에는 그 강을 기점으로 너무 많은 사람과 너무 많은 지점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지점을 가지고 이쪽편과 저쪽편은 필히 구분했을 거란거다. 그게 동과 서의 지칭은 아닐 수 있지만 이집트의 동서를 구분할 수 있는 명칭이나 개념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일강을 기준으로하는 파라오가 사는편과 그 건너편, 이정도의 구분은 분명 있었을 것이고 그게 지금의 기준으로 동과 서였을 거란 거다. 사람 몸에도 상하좌우가 있는데 그걸 인지하고 구분한 이후로 강의 상류/하류를 알면서 그 좌우를 구분 안했다는게 말이 안된다.≫라고 반론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반론이 오히려 위의 주장을 너무 비약, 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 몸에도 상하좌우가 있지 않으냐"고 하지만 '나를 기준으로 한 상하, 좌우, 전후의 방향 개념'과 '지리적 방향의 객관적 기준인 동서남북'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전후좌우를 따지는 개념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지극히 힘들지만 위의 주장은 '지리적 방향 개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좌우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냐"고 반론하는 것이 오히려 비약이라는 것.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다른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북쪽으로 얼마, 동쪽으로 얼마만큼 가야 한다"고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 문화권에서는 "상류 방향(남쪽)으로 얼마만큼 가면 (가던 방향 기준) 우안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 이런 점에서 고대 이집트의 경우 (거리와 결부된) '''지리적''' 방향 개념, 달리 말하면 '목적지까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를 설명하는 개념이 1차원적이었다는 것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집트/역사]]와 [[고대 이집트]]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기적으로 범람하면서 많은 양의 퇴적토를 나일강 하류 연안으로 가지고 왔기에, 농업 생산력이 높아져 고대 이집트 문명을 번영시켰다. 또한 강의 주기적인 범람을 예측할 필요성이 크게 작용하여 이집트 [[천문학]]과 역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주기 예측과 범람으로 인한 토지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측량술[* 이 범람으로 인해 [[정적분]]의 기원이 생겨나기도 했는데, 나일강의 범람은 지력을 공급하는 고마운 존재지만 그 대가(?)로 농지를 '''엉망진창으로 뒤섞어버리기 때문에''' 지주들끼리 [[병림픽]]의 장이 되었을 정도이고, 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곡선을 간단한 도형으로 근사시키는 측량법이 생겨났다.]과 수학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나일강의 신인 하피가 인간이 수학을 하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헤로도토스]]가 "이집트는 나일강의 선물이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나일강이 있었기에 이집트 문명이 발흥할 수 있었다는 얘기.] 비록 이집트만큼 영향력이 크진 않았지만, 수단과 에티오피아에서도 이른 시기에 문명과 국가가 발흥한 것 역시 (이집트의 영향도 있지만) 나일강의 덕이 컸다.[* [[달력]]의 1월 1일도 사실은 태양과 [[시리우스]]가 같이 뜨는 날로 이날부터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되어서 정한 것이라 한다.] 나일강의 범람으로 인해 강가에 쌓이는 퇴적토는 굉장히 비옥했으며, 농부들은 범람이 끝난 후 씨앗을 대충 뿌린 후 소와 돼지를 풀어 씨를 밟아 심게 하였다. 게다가 기온마저 원체 따뜻한 지역이다보니 이렇게 대충 심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일강의 농민들은 사실상 씨를 뿌리고 수확만 하면 되었기에 다른 지역의 농민들에 비해 굉장히 일이 쉬웠으며 수확기까지 시간적 여유가 많았다. 이러한 잉여 기간 동안 농민들은 국가의 각종 건축 사업 등에 참여하여 추가 소득을 얻을 수 있었으며, 덕분에 이집트는 [[피라미드]]를 비롯해 압도적인 규모의 유적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이런 나일강의 중요성은 현대에도 여전해서, 아래에 언급하듯이 이집트는 나일강의 물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다만 여러 방법으로 농업 생산력이 높아진 현대에는, 토지 구획을 쓸어버리는 나일강 범람이 마냥 좋다고만은 보기 어려웠다.)현대 이집트의 인구 분포도 거의 대부분이 나일강 유역과 해안 지역에 [[https://en.wikipedia.org/wiki/Demographics_of_Egypt#/media/File:Egypt_2010_population_density1.png|집중]]되어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같은 면적당 무식한 수준으로 많은 벼가 생산되는 걸로도 유명한데 아프리카의 강 주변에서 평균적으로 헥타르당 3톤의 벼가 수확되는데 여기선 9.3톤이나 생산된다. ~~사기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