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징시 (문단 편집) === 두 번의 비약과 쇠퇴 === [[파일:난징 중국 1.jpg|width=600]] 명대의 난징(응천부) 지도 [[파일:남경성 중국.jpg|width=600]] 명대에 세워진 난징부성 [[육조시대]] 이후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난징이 다시 비상하게 된 것은 [[명나라]]가 들어서고 나서부터였다. 원나라 말엽 [[안후이성]]에서 활동하던 군벌 [[주원장]]은 1356년 집경(난징)을 함락시키고, 이름을 응천부(應天府)로 고친 후 스스로 오국공(吳國公)의 자리에 올라 근거지로 삼았다. 그 후 [[진우량]], [[장사성]] 등 다른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강남의 패자가 된 주원장은 1368년 응천부(난징)에서 칭제건원하며 명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명나라는 북벌을 단행하여 쇠락해가는 원나라를 만리장성 너머로 몰아내고 중원을 통일했으니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장강]] 이남에서 기반한 통일이었다. 주원장은 응천부라는 이름에 더해 우리가 아는 현재 명칭인 '''난징'''[* 정확한 명칭은 난징 응천부이고, 영락제 때 천도한 베이징 순천부에 대칭되었다]으로 고쳤으며 건국 10년째인 1378년에 정식으로 난징을 수도로 정하고, 이름을 경사(京師)[* 다른 의미 없고 그냥 수도라는 뜻이다.]로 바꾸었다. 경사 혹은 난징은 [[건문제]] 시대까지 수도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정난의 변]]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영락제]]가 1403년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였던 순천부(順天府)[* 원래 이름은 대도로 [[원나라]]의 수도 였다. 대도를 정복한 [[주원장]]은 이후 대도를 순천부로 개명했다.]로 옮기고 이름을 베이징으로 바꿨다. 그리고 경사는 '북쪽의 수도' 베이징에 대비되는 '남쪽의 수도'인 난징으로 환원시켰다.[* 다만 신하들의 거센 반대 때문에 거대한 [[베이징 성]]과 [[자금성]]을 짓고도 [[영락제]]는 정식으로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영락제의 뒤를 이은 [[홍희제]]는 수도를 난징으로 환원시키려했으나 뜻을 이루기 전에 죽었고 뒤를 이은 [[선덕제]]가 계속 베이징에 머무르면서 베이징의 수도 지위가 굳어지게 된다. [[명나라]]가 정식으로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것은 [[선덕제]]가 죽고 [[정통제]]가 즉위한 [[1441년]]이었다. 이후 황제들이 베이징에 머무르면서도 베이징을 경사(수도), 행재(임시수도)로 여러 번 개칭한 바는 있다. 또 난징에도 베이징과 별도로 수도의 여러 중앙 관부를 두기도 했다. 일종의 [[백업]]을 한 셈인데 이게 [[토목의 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명말 [[청나라|청]]이 밀고 내려오자 복벽운동으로 [[남명]]이 저항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금방 함락되었고 명 황실은 [[정성공]] 등과 함께 [[광둥성]], [[윈난성]], [[베트남]], [[타이완]] 등으로 뿔뿔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남명]]의 강역엔 간신히 들어가지만 의미도 없을 수준이다. 이로 인해 난징은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고 청나라는 난징을 이름을 강녕부(江寧府)로 고쳤다. 그래도 그 경제적 중요도는 변치 않아서 [[청나라]] 대에도 난징은 [[중국]]의 경제적 수도 역할을 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