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국시대 (문단 편집) == 개요 == '''남북국시대'''는 [[한국사]]의 [[시대구분]] 중 하나다. 넓게는 신라의 [[삼국통일전쟁]]부터 [[후삼국시대]] 이전까지, 좀 더 정확하고 좁게는 [[발해]]의 건국인 678년 or 684년 or 698년부터 견훤이 호남지방에서 봉기한 892년 혹은 신라가 [[후삼국]]으로 갈라진 900년까지를 말한다. 1990년대만 해도 삼국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하며 국사 교과서에서 가르쳤으나, 발해에 대한 재인식[* 예: [[발해를 꿈꾸며]]가 대중가요로 불러질 정도로 해당 시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정치적으로도 북한과의 화해 무드에 접어들며 발해에 대한 대중의 관심 역시 전보다 높아졌다. 이 시기에 [[대조영(드라마)]]과 같은 발해 관련 컨텐츠도 제작되었고 [[역사스페셜]] 등에서도 발해사 재조명이 이루어졌다.]이 이루어지면서부터 발해가 존재했기 때문에 엄밀하게 통일신라만의 시대라고 말할 수 없고, 따라서 남북국시대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를 '통일신라와 발해'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측면은 엄존한다.[* 남북국시대란 어려운 용어를 지양하는 [[초등학생]] 대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어찌되었건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남북국시대라는 명칭은 그럼 적절한가라는 의문은 계속 지적되고 있다. 일단 신라에서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던 기록은 있지만, 발해에서 신라를 남국이라고 부른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점이 주요한 근거. 삼국의 경우 '삼한'이라는 의식을 공유하였고 수 세기간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한 반면,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동류 집단으로 인식했을 개연성이 삼국에 비해 적고 경쟁 또한 제한적이었으며 역사기간 내내 무관심의 태도로 일관하였다. 지극히 후대인의 기준인 남북국이라는 표현이 과연 옳은지 논란은 있다.[* 물론 이런 시대사에 대한 논쟁은 [[원삼국시대]], [[삼국시대]]에 대해서도 끊임이 없다. 후술하겠지만 남북국시대라는 표현은, 미래의 후손들이 고려의 통일 이전 시대의 불완전성에 대한 평가와 더해, 당시의 두 국가를 한국사의 국가로서 포괄한다는 의지적 표현이란 점이다.] 한편 통일신라란 표현을 유지하는 이유는, 신라의 '통일'이 발해의 건국에 선행하였고[* 즉 어찌되었든 고구려 멸망 시점에서 발해 건국 시점까지, [[괴뢰국]]을 제외한 제대로 된 한국계 주권국은 지구상에 오직 신라뿐이었다.], 신라의 국가체계 자체가 '통일' 이전과 달라졌으며, 신라의 삼한일통을 첫 통일로 여기는 관점이 전근대 내내 지속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발해 자체가 완전히 한국사에만 귀속되기보다는 경계사적 특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닌, 신라의 정복 전쟁이란 표현도 종종 보인다. 다만 통일신라는 그 이전의 신라와 뚜렷한 차이를 보이기에, 통일신라라는 말을 대체하기는 쉽지 않다. '후기 신라'로 쓰면 간단할 것 같지만 신라 하대가 있기 때문에(...)][* [[삼국 시대]]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와 [[통일신라|676년 이후의 신라]]는 어떻게 보더라도 국가의 성격이 너무나 바뀌었기 때문에 구분하는 용어 자체가 없으면 상당히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은 당시에는 그냥 구분 없이 쭉 이어지는 '로마'라고 불렀는데,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그 둘 다 그냥 로마 제국이라고 부른다면 상당히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같은 나라라고 해도 용어 자체의 구분은 필요한 것이다. 후기신라, 대(大)신라 등 통일신라를 대신할 다른 용어가 제기되기도 했다. 신라의 국명 표기 문제는 [[통일신라]] 문서 참조. 애초에 천년왕조 신라도 [[사로국|신라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 신라로 퉁치는거랑 비슷하다. 다만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는 다른 전례가 없기 때문에 이 역시 논란을 낳는다.] 당시 신라가 고구려, 백제를 통합했다고 당시에 스스로 인식했던 것은 사실이다. 발해가 건국되기 이전인 7세기 후반부터 [[보덕국]], [[9주 5소경]] 행정구역 설정(옛 고구려, 백제, 신라에 각각 3주씩 부여해서 9주), 9서당 설치 등 '고구려도 이제 신라의 일부'로 간주하고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고, 당시 신라는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 [[보덕국]]왕으로 봉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완전히 흡수합병했다. 무엇보다 발해는 통일신라가 등장하고 나서도 무려 20년이 넘게 지나고 나서야 건국되었기 때문에 이 공백기간, 즉 지구상에 제대로 된 한국계 주권국으로는 신라뿐이었던 이 동안 신라인들 스스로가 삼국을 통일했다 믿고 있었어도 그렇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고, 영토가 아닌 국가의 흥망 기준으로만 보면 맞는 일이기도 했다. 어쨌든 기존의 백제와 고구려는 나당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멸망한게 사실이니까. [[삼한일통]]을 신라가 삼국을 정리한 이후에 원활한 통치를 위해서 밀었던 프로파간다로 보는 시각이 있고, 그것이 일부 진행되었던 것을 한 차례 혼란기 후 고려 왕조가 이어받아서 완료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기 때문에,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이 삼국시대 당시엔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국시대가 끝난 직후, 즉 [[통일신라]]라고 칭하는 국가부터는 확실히 삼국통일, 삼한일통이라는 의식이 존재했다. 삼국 간에 여러 모로 어느 정도 동질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당시 중국 측의 기록에서도 삼국을 하나의 족속으로 묶어 기록한 부분이 보인다. 어쨌든 이런 신라의 삼국통일 선언 이후 30년이 지나 건국된 발해의 존재는 신라, 그리고 고려의 삼한일통 의식상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후손은 맞는데 직계는 아니고 [[방계]]라는 식으로 애매한 취급을 했고, 삼국유민 의식이 소멸한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한국사로서의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역사관에 따르면, 한 왕조가 새로 개창되면 같은 문화권의 전 왕조의 역사책을 정리해 편찬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지만 완전한 통일은 아니었고, 때문에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 때 [[삼국사기]]가 편찬되었던 것이다. 발해는 고려 극초기까지는 동시대에 공존했고 [[정안국]]과 [[발해 유민]] 문제도 있어서, 고려가 다루기는 어려워 조선 때야 비로소 다룰 수 있게 된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통일신라시대라고 칭하게 되는 순간 [[자충수|발해가 중국 역사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 통일신라를 옹호하는 측은, 중국이 부여사를 기점으로 부여-고구려-백제-발해를 통째로 계통화하려는 시점에서 신라의 성공적 영토 확장을 비하하는 것은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견해로 맞서고 있다. 간혹 동북공정을 반대하는 사람조차 발해가 과연 한국만의 역사인지 의문을 가지거나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분명히 한국과의 연관성이 높은건 사실이지만 말갈을 비롯한 여러 북방민족들도 있었고 주요 강역 및 인적 자원 역시 발해의 멸망 이후 한국사의 흐름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발해의 한국 귀속 문제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요~금 치하의 발해계에게 발해인의 정체성이 존재했다는 점을 드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이 한국의 고려 왕조가 아닌 북방 이민족 왕조 치하에 놓였음을 의미한다. 결국 수많은 발해인이 발해의 고토에 그대로 남아 현 한국인의 원류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은 발해를 순수한 한국사로 보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