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국시대 (문단 편집) == 시대적 특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신라-발해교류.jpg|width=100%]]}}}|| || {{{#000,#fff 남북국시대의 교류.}}} || 이 시대는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났던 [[삼국시대]]의 전란을 종식시키고 수백년간의 평화기를 맞이하였다. 11세기~13세기의 고려, 조선 전기 200여년, 후기 250여년과 함께 한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네 시대 중 하나이다. 그 중에서도 남북국시대는 고려시대처럼 대대적인 외침과 정벌이 없었고, 몇 차례의 반정과 내란은 있었지만 해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안정된 시대였다. 발해는 기록이 부족하여 장문휴의 등주 침공 외에도 영토확장 과정에서 전쟁이 있었을 가능성은 크지만, 일단 고구려 때와 비교한다면 훨씬 분쟁이 적고 평화로웠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 입장에서도 고구려에 비해 발해의 중심지가 중국과 거리가 멀기도 했고 당 자체의 국력도 이전보다 쇠퇴한데다 발해가 전신인 고구려에 비해 덜 호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나라도 더 이상 초기처럼 대외원정에 집착하지 않았고 발해도 당의 권위를 적당히 인정해 균형을 이루었다. 남북 양국간의 충돌도 거의 없었는데 발해의 중심지는 고구려 시절보다 훨씬 북쪽이었고[*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은 450km 정도지만,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까지는 1천여 km에 달한다. 최전방 기준 거리를 따져도 신라 수도에서 고구려 국경까지 장수왕~문자명왕대 30km 언저리 까지 근접했었고 마찬가지로 진흥왕 이후 고구려 수도에서 신라 국경까지도 약 150km밖에 떨어지지 않았었기에 양국은 서로(+백제)에게 군사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 반면 신라와 발해 국경에서 신라 서라벌과 발해 상경까지는 각각 약 400km, 600km 가량 떨어져 있어 서로에게 군사적 부담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에게는 일본이, 발해에게는 거란이 더욱 큰 군사적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양국 모두에게 가장 큰 위협은 단연 패권국인 [[당나라]]였다.] 남북으로 대치한 두 나라 사이에서 본격적인 대규모 군사적 충돌은 수백 년 간 거의 없었다.[* [[성덕왕]]의 733년 발해 공격의 경우 이는 가다가 폭설로 그냥 돌아왔고, [[요사]] 지리지에서 발해 [[선왕]]이 신라에 승리한 기록, 일본 기록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신라가 발해에 승리한 기록 등이 전해지긴 하지만 실제 전쟁 상황이었는지는 학계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고 전쟁이 있었다 하더라도 전면전과는 거리가 먼 극히 제한적인 충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발해 역시 신라는 물론 전 왕조 고구려와 달리 국가 초기 이후로는 당나라와의 무력 충돌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일본 역시 국가 내부가 안정되고 과거 적이었던 신라와 화친하면서 규모가 큰 무력 대립은 사라졌다.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나 남북국 시대 후기로 가면 당나라 해적이나 [[거란]]족의 대두 같은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전면전]]이 일상이었던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위협도는 확연히 적었다. 물론 한국과 일본측 사서들에서는 이 시기 일본이 신라를 병선 300척으로 공격했다가 곧바로 격퇴당했다거나 신라가 서일본 지역을 공격했다는 기록들도 꽤나 나와서 아예 대규모 무력충돌이 전혀 없었는지는 확실치 않은 부분들이 있기는 하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국가간 전면전이 사라지고 동아시아 정세가 안정화된 것에 덧붙여 [[당(통일왕조)|당]]과 [[이슬람]] 세계의 국제성에 힘입어 한반도 왕조에서도 국제적인 조류를 타, [[중동]]까지 신라가 알려져 세계지도와 지리서에 신라의 이름이 등장하고, 발해는 [[모피]] 수출로 이름을 날리는 등의 족적을 남겼다. 국가간 인적 교류도 후대에 비해 더 활발했다. 8세기 후반 들어 당, 신라, 발해, 일본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정치적 혼란 속에 빠지면서 국제성은 쇠퇴하고 연안 무역이 발달하긴 했지만, 9세기 초 발해와 신라가 약간의 회복세를 보이면서([[선왕]]과 [[흥덕왕]] 등) '신라도'가 뚫리고 [[청해진]]이 설치되는 등 교역은 오히려 더 활성화되었다. 신라도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신라 북쪽 천정군의 '탄항관문'부터 발해 책성부([[훈춘]])까지 39개의 [[역참]]이 줄지어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역에는 각각 필요한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역과 역 사이에는 도로도 관리되어야 한다. 교통로가 활요되지 않는데 수십 개의 역을 둘 필요는 없으므로 남북국간 교류는 실제로 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인적 교류 면에서도 예를 들어 [[박씨]]는 [[박혁거세]]로부터 비롯된 대표적인 신라계 성씨지만[* 현대에도 전세계의 박씨는 [[조선족]]이나 기타 [[재외동포]]를 포함하여 [[한민족]], [[한국계]]가 절대다수이다. [[중국어 위키백과]]에도 박씨는 조선인(한민족) 특유의 성씨라고 서술되어 있다.] 발해에서도 박어, 박승 등 벼슬을 지낸 인명이 확인된다. 두 나라는 9세기 초반에 중흥했으나 쇠퇴는 서로 비슷한 시기에 천천히 소리없이 다가왔다. 10세기 들어 당나라가 멸망하며 중원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야율아보기]]가 통합한 거란이 성장하여 발해와의 장기적인 소모전에 들어가 끝내 발해를 멸망시켰고, 신라 역시 진골들의 소모적인 내전 상황에 이은 민란의 폭발과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로 인해 쇠퇴했던 것이다. 결국 892년에 [[견훤]]이 호남에서 봉기한 것을 시작으로 후삼국으로 분열([[후삼국시대]])하였으며, 고려가 삼한의 재통일을 이룸으로써 남북국 시대는 완전히 종결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