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북분단 (문단 편집) == 과정 == 1945년 8월 15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연합군]]사령부는 당시 [[일본]]의 속령에 있던 [[한반도]]에 주둔 중인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미군]]이, 북위 38도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출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그 후 8월 [[소련]]이 가장 먼저 군대를 한반도 북부에 진출시켜 [[소련군정]]을 세웠고, [[미국]]도 9월 쯤 군대를 한반도 남부로 진주시켜 [[미군정]]을 세웠다. 한반도의 북쪽에선 전쟁이 다 끝나가 잡병이 된 관동군과 만주 전쟁을 통해 내려온 소련군들에게 관동군이 천황의 옥음방송으로 항복하고, 한반도의 남쪽에선 이오지마, 오키나와, 일본 본토까지 밀고 올라온 미군들에게 일본군들이 각각 항복하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독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그러했듯이 한국 역시 양국의 갈등이 나타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련은 이미 동유럽을 거의 잡아먹고, 핀란드의 숨통까지 잡은 상황이었으며, 이탈리아와 일본을 미국이 처리하도록 합의했으나, '''독일'''과 '''한국'''에선 양국의 이해관계가 연이어 충돌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승전한 미국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 재편에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미국의 '대지역(Grand Area)' 구상과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하에서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은 핵심지역(a key world area)으로 간주되었다. 종전시 이 지역의 군사정세가 이후의 한국문제 처리에 중요했기에 미국은 자신의 발언권과 주도권 확보를 위해 미국측에 유리하게 조성할 수 있는 현실적 대비책이 필요했다. 미국 군부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동북아시아 초래할 정치적 영향력에 대비해 연합군 공동점령•공동시정 방침 또는 분할점령안을 마련했다. 1945년 8월 8일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포 후 일본이 일찍 항복하자,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고자 38선 분할점령안을 소련에 제안했고 소련은 전후 대일 발언권 확보 차원에서 미국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했다.[* 출처 :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길잡이 하 (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370~371쪽 참고] 38도선을 경계로 소련은 한반도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길 원했고, 미국은 자유주의 정권을 세우길 원했다. 남북에 미군과 소련군이 주둔하며, [[스탈린]]은 [[김일성]]을, [[트루먼]]은 [[이승만]] 쪽을 지지하며 한반도 남부와 한반도 북부가 결국엔 합의를 얻지 못하고 독자적인 정부가 출범해버린 것이었다. 이후에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후에도 90년대까지 남북한 각국은 세계 여러 국가의 이해관계와 [[냉전]] 상황에 맞물려 국교 수립이나 UN 가입에도 제약이 많았다. 대한민국의 UN 가입은 [[소련]]을 필두로 중국이나 동독, 폴란드, 베트남, 쿠바 등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방해 때문에 제약을 겪었고, 이들은 한동안은 대한민국을 국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북한의 UN 가입은 [[미국]]을 필두로 영국, 프랑스, 서독, 일본, 대만 등의 제1세계 국가들의 방해가 이어졌고, 이들 역시 북한을 인정하지 않았다. 90년대 들어서 소련의 해체와 함께 냉전이 끝나고 결국 남북한 각국은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독자국가로서 UN 가입도 이루어내나, 현재까지도 냉전 당시의 구도와 비슷하게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라는 대립 구도가 유지, 분쟁과 갈등이 도사리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