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송 (문단 편집) == 계속되는 금과의 전쟁과 [[개희북벌]]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0px-Battleofzhuxiancounty.jpg|width=1000]] 황제로 즉위한 송 고종은 곧 주전파 관료들을 기용하여 군사를 소집하는 등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으나 이런 행위는 금을 크게 자극하였고 한창 기세가 오른 금이 이런 고종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마침내 금은 '송나라가 초나라를 무너뜨리고 초 황제 장방창을 죽였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다시 대규모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금의 공격이 맹렬하여지자 고종은 응천부를 버리고 양저우(楊州), 항저우(杭州), 원저우(溫州) 등으로 고종은 계속해서 달아나고 급기야 1129년에는 '''배를 타고''' 바다로 도망가기까지 한다. 그 경위는 다음과 같다. 1129년 남송 정부는 수세에 몰리자 수도를 난징에서 바다와 가까운 [[항저우시|임안]]으로 옮겨 끝까지 저항할 뜻을 밝힌다. 그런데 난징을 함락시킨 딱 3달 후 금나라 군대는 임안까지 함락시킨다. 바로 이 때 고종이 바다로 달아난 것. 여기까지는 송나라의 [[사망 플래그]]였다.[* 실제로 이 사망 플래그는 [[원나라]]의 [[쿠빌라이 칸]] 때 재반복 되는데, 이번에는 [[악비]]고 의병이고 협상이고 그딴 건 없고 그대로 남송 황족 전원이 바다로 몸을 던져야했다.] 양쯔강 이북을 점령한 [[금나라]]는 1130년 대제(大齊)라는 제2의 괴뢰 국가를 세워 항장인 유예(劉豫)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토록 강남이 이민족에게 유린당한 적은 [[남북조시대]]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황은 1130년부터 갑자기 바뀌게 되는데, 남송의 명장 [[한세충]]이 1130년 4월 강중에서 최초로 금군을 대파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진회]]가 포로에서 탈출해 남송에 복귀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후 5월에는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1131년에는 [[오린(북송)|오린]]과 오개 형제, 수군장수 강민 등이 화상원에서 금군을 대파한다. 1133년에는 악비가 강광의 군도를 평정했고 1134년이 되면 한세충이 다시 한번 금군을 대파하였다. 계속되는 패배로 실의에 빠진 [[태종(금)|금태종]]이 1135년에 죽자 금군은 북쪽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1142년 [[진회]]의 협상으로 양국은 휴전하기로 합의를 봤고, 그가 죽은 후인 1162년에 금나라 [[해릉양왕]]이 재침을 계획했으나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채석기에서 가로막힌다. 그 이후 금 진영에서 반란이 일어나 해릉양왕이 살해되고 [[세종(금)|금세종]]이 즉위하였다. 송 효종 시기 [[장준(송나라)|장준]]을 중심으로 [[융흥북벌|북벌]]을 시도하나, [[이현충]]과 [[추굉연]]과의 반목으로 인해 북벌에 실패하였고, 금과 다시 화평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남송은 [[회하]]까지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개희북벌|이렇게 기반이 쌓인 1206년에 한탁주가 자신의 권세 확장을 북벌을 시도하였지만]]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다. 이렇게 남송과 금나라 모두가 서로를 먹어버릴 역량은 없는 상태에서 어느새 강성해진 몽골이 금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남송에서는 금을 경제적으로 도와서 몽골을 막게 해야 한다는 주장과 금을 먹어서 힘을 키워 몽골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하게 되었다.[* 통념과는 달리 [[금나라]] 정벌을 주장하는 측에서도 몽골이 장차 위협이 될 거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몽골과 연합해서 금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 게 아니다.] 당시 여론은 후자가 우세했지만 어쨌든 남송은 양측 의견을 절충해서 [[금나라]]에 바치던 세폐를 끊지만[* [[진덕수]]는 송 영종에게 금이 몽골의 공격을 받는 틈을 타 금에 바치는 세폐를 끊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고 사후 대책을 주장하였다.] 금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기로 한다. 그런데 남송이 조용하고 싶어도 이번에는 금나라가 가만있질 않았다. 몽골에 패배해서 영토를 크게 잃은 금나라가 그나마 만만해보이는 남송을 공격해서 자신이 잃은 만큼 뜯어낸다는 발상을 한 것. 아무리 순망치한이라지만 남송이 고분고분 침공을 용납할 수 없던 건 당연했고 이 충돌이 반복되며 양측의 국력 소모는 극심해진다. 처음에는 금나라가 [[대산관]]을 점령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맹종정]], [[호재흥]], [[가섭]] 등에 의해 가로막혔다. 여기서 가섭은, 산동 일대의 홍오군과 연계하여 고토수복을 노리기도 했다. 결국 먼저 두 손 든 쪽은 몽골과 직접 국경을 맞댄 금나라였는데 [[애종(금)|애종]]이 즉위하고 나서 남침 행위를 중단하고 송나라와 평화 협상을 제안하지만 남송은 이미 금나라의 멸망은 돌이킬 수 없으니 괜히 금나라를 도와서 몽골을 자극할 바엔 차라리 몽골과 우호관계 맺어서 전쟁준비할 시간을 버는 게 낫다고 판단하여 몽골과 동맹을 맺는다. 게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금 애종도 결국 다시 남송의 사천 일대를 먹어서 근거지를 확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삼봉산 전투]]이후 금 애종이 채주로 천도하였다. 그러나 채주에서도 버틸 수 없었고, 삼봉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무선(금나라)|무선]]이 사천 일대를 점거해 재기하려 했으나 [[맹공]]의 선무공작으로 인해 실패하고, 결국 전군이 복멸당하고 말았다. 그는 홀로 도주한 뒤 1234년 금 멸망 이후 몽골 수비병에게 잡혀 죽게 된다. 결국 [[금나라]]와의 전쟁은 1234년 남송이 [[몽골 제국]]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킬 때까지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