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송학 (문단 편집) == 생애 == 1903년 7월 23일 [[한성부]] 서서 마포계(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 [[충청북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http://db.history.go.kr/id/im_102_00104|#]]]에서 태어났다.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과를 교외생으로 졸업했다. [[8.15 광복]] 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용산구지부장·중앙상무위원·서울시지부 재정부장, 민족대표자대회 용산구선출대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에는 총선거대책위원회 중앙본부 재정부장을 맡았으며 그 해 12월 [[대한청년단]]이 발족되자 용산구단 단장이 되었다. 한편 남양인쇄소(南洋印刷所)[* 1956년 7월부터 1957년 12월 사이에 남양인쇄사(南洋印刷社)로 개칭하였다.[[http://db.history.go.kr/id/hs_003_1956_01_30_0650|#]][[http://db.history.go.kr/id/hs_003_1957_12_30_3330|#2]]]를 경영하면서 1945년 9월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를 발족하여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8년 8월 [[사단법인]] 대한인쇄협회를 창립하고서도 이사장으로 취임했다.[[http://www.print.or.kr/bbs/board.php?bo_table=B41&wr_id=53&sca=F|#]] 또 인쇄문화시보사(印刷文化時報社)를 설립하여 기관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http://db.history.go.kr/id/hs_003_1957_12_30_0290|#]]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용산구(선거구)|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민주당]] [[김동원(정치인)|김동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인 [[민주국민당]] 김동원 후보에 설욕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여 중앙본부 훈련부장에 임명되었고, 19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 반대파 국회의원들의 출입문 감시를 맡았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1955년)|민주당]] [[엄상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1년 3월 [[3.15 부정선거]] 등의 혐의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에 의해 공민권이 제한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건 자유당 [[전국구]] 국회의원(제3번)으로 입후보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1965년 [[서민호]]가 [[한일기본조약]] 반발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자유당(1963년)|자유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한국독립당(1963년)|한국독립당]] [[김두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