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재준 (문단 편집) === 군인 시절 === 군인 시절의 남재준은 뚝심있고 강직한 성품이었다고 평가받는다. 육사 출신이었지만 하나회에 가입하지 않은 탓에 [[영관급 장교]]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절 막대한 인사 불이익을 받아왔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할 때는 육군사관학교 + 보병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4차 이상에 진급했고, [[대령]] 진급도 3차에서 할 수 있었다. 보통 3,4차 진급은 다음 계급으로 진급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13/07/23/201307230500006/201307230500006_3.html|新東亞 2013년 8월호 기사]] 아무리 하나회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으로 진급에서 밀리는 케이스는 흔치 않았다. 사실 그는 정권에 밉보인 상태였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군부가 벌인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육군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으로 반란군과 총격전으로 맞서다 사망했던 [[김오랑]] 중령[* 당시 소령. 이후 중령 추서]이 그와 육사 동기였다.[* 시간이 지나고도 친구 무덤에 찾아가서 울분을 토했던 걸 보면 꽤나 친했던 모양이다.] 이 사건이 터졌을 당시 남재준은 소령 계급으로 [[육군대학]] 교관을 맡고 있었고, 친구가 사망한 직후 강의 도중 군의 정치개입을 강력히 성토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그가 육군대학 교관이었다는 것은 유능한 장교였음을 방증한다. 육대 교관 중 한직도 물론 있지만, 정규과정 장교를 직접 대면하고 강의해야 하는 육대의 소령급 교관은 예나 지금이나 [[요직]]이다.] 자주 김오랑 중령의 무덤을 찾아가 울분을 터뜨렸기 때문이다. 즉, 육군 내부의 청년장교들 중 전두환 반대파였기 때문에 단단히 찍혔던 것.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9/22/200409220500015/200409220500015_3.html|新東亞 2004년 10월호 기사]][* 전두환에 대한 증오가 나이를 먹어서도 식지 않았는지 남재준은 국정원장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전두환]] 은닉재산을 추적해 데이터를 모아 검찰에 넘겨줘서 터트리게 만들었다. 이 덕분에 노태우는 추징금을 완납했고 전두환은 끝내 납부하지 않았으나 대신 그의 차남을 노역신세로 만드는 데 성공.] 이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대대적인 [[하나회]] 숙청 작업이 실시되었다. 덕분에 숱한 고위급 장성들이 갈려나갔으며, 그 반사이익으로 군사정권 시절 [[영관급 장교]]였을 땐 매번 진급에서 물을 먹던 남재준도 기사회생,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남재준은 중령, 대령 진급을 3-4차로 밀리던 것과 달리 중장까지의 진급을 1차에 하였고, 그것도 6사단장, 육본 인사참모부장, [[수도방위사령관]], 합참 작전본부장 등 요직[* 수방사령관과 합참 작전본부장은 대장 진급에 파란불이 들어왔다고 봐도 좋을 만큼 중장 보직 중 최고의 요직들이다. 많은 대장들이 합참 작전본부장직을 중장 때 거쳐갔다.]만을 지냈다. 모든 진급을 1차에 끝냈다고 알려져 있으나 대장 진급은 동기인 김종환(1군사령관, 합참의장), 서종표(3군사령관)가 2001년에 이미 진급했지만 남재준은 2002년 상반기가 돼서야 진급했다. 남재준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냈고 2003년에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당시 3군사령관인 서종표 대장을 꺾고 참모총장이 되었다. 1군사령관이었던 김종환 대장은 합참의장이 되었다.] [[노무현]] 정권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재직 중 그 유명한 [[병영생활 행동강령]]을 시행하고, 2003년 즈음에는 폐타이어로 축성되어 있던 '전국의 모든 전투진지'를 [[진지공사]] 할 때 콘크리트 블록이나 흙벽돌 등으로 재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전자의 경우 육군 내 각종 가혹행위나 구타 등의 [[병영부조리|부조리]]를 청산하고 후자 역시 겉으로 보기엔 환경보호에 앞장섰다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일선 부대에서 시멘트, 흙, 지푸라기 등을 섞어 만드는 흙벽돌의 경우 내구성이 헝편없어 매년, 심지어 비만 오면 금이 가고 무너지는 등 부작용이 있다.[* 흙벽돌이란 게 원래 처음부터 흙 종류도 잘 골라야 하고 흙과 시멘트와 돌 비율 정확히 맞춰 화로불에 구워야 단단한 벽돌이 나온다. 즉 준비와 재료에 대한 이해수준이 높아야 되는데, 여기에 대한 이해는 없이 예산과 재료를 배정한다. 때문에 보통은 진지 근처 아무 흙 갖고 햇볕에 말려서 만드는 수준이 된다. 제작 중에 습한 날씨가 되면 마르지 않고 스스로 무너지는 수준인데 비까지 오면 당연히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게 [[리얼입대 프로젝트 진짜 사나이]]같은 TV프로에도 나오고 지금까지도 매년 친환경 진지 구축이라고 프로파간다를 타고 있는 흙벽돌 진지의 실체다.] 군 전통의 악습 '보여주기'의 병폐가 좋은 의도를 말아먹은 셈. 재밌는 건 당시 현역 장병들에게 '쌩 노가다 시키고(진지재구축) 고참병들 권위 깎는다(행동강령)'고 평가절하 당하곤 했었다. [[2004년]] 말 본인이 연관된 [[장성급 장교|장성]] [[진급]] [[비리]] 관련 연루 의혹 등이 국방부 군검찰 등에서 제기된데다가 청와대 주도의 군 인사가 일어나면서 이를 두고 청와대 - 국방부 - 육군본부 - 기무사 간의 갈등관계가 일어났을 정도였다. 결국 이런 문제들이 터지면서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하고 2005년 상반기 인사에서 전역했다.[* 당시 핵심 수사진은 국방부 검찰단 보통검찰부장이었던 남성원 소령과 고등검찰관이었던 [[최강욱]] 소령 등이었는데, [[윤광웅]] [[대한민국 국방부장관|국방부장관]] 및 주요 군 수뇌부가 이 사건에 대해 정치적 이유로 수사를 제약한다는 점을 들어 집단 사퇴서를 제출하였고, 이들은 결국 이후에 보직해임되었다.][* 당시 수사를 맡은 최강욱 변호사는 정봉주의 전국구에서 당시 일을 이야기하며 남재준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판단은 알아서.] [[2005년]] [[대장(계급)|대장]] 예편 후 [[서경대학교]] [[군사학과]]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이후 [[충남대학교]] 군사학부 명예교수를 역임하며 교육계에 잠시 몸담은 적이 있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7/02/06/200702060500015/200702060500015_1.html|2007년 남재준 대장 인터뷰]] 이때 있었던 육군사관학교 특강에서 [[https://mnews.joins.com/amparticle/23647173|"생도들은 내가 부러운가? 나는 생도들이 너무 부럽다. 생도들은 얼마든지 육군 참모총장이 될 수 있지만, 나는 다시는 생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꿈이 있는 생도라는 신분에 감사해라"]]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 발언이 끝나자마자 생도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현역 고급 군인이 골프치는 것을 비판했다고 언론사편으로 보도된 적 있다. "골프를 치는 것은 개인 사생활인 만큼 공과 사를 구분하면 그만"[[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3/1903846_19578.html| 참모총장 임명때의 MBC뉴스, 2003년]], "대한민국 군대의 장교가 주중 내내 골프를 화제로 삼고 주말엔 골프장을 찾는다면 차라리 골프선수가 되지 왜 군인이 되었는지 모르겠다"[[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401211431281&code=113|주간경향, 2014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