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조선로동당 (문단 편집) ==== 김삼룡 이주하 사건 ==== [[파일:김삼룡이주하.jpg]] 남로당은 1950년 3월 남한 내 남로당 핵심 간부였던 [[김삼룡]]과 [[이주하(1905)|이주하]]가 검거되면서 완전 붕괴되었다. 김삼룡과 이주하 검거 과정은 여러 목격자의 증언이 엇갈린다. 검사는 김삼룡을 쫓는 과정에서 이주하를 발견하여 이주하 먼저 체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체포현장 목격자 중 하나인 박헌영 아들 원경은 김삼룡 먼저 체포되고 이주하가 김삼룡을 구할 방법을 고민하며 경찰서 근처에 있다가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정태식은 또 이들을 구하려다 체포되었다. 김삼룡과 이주하는 1950년 6월 북한에 의해 역시 북한에 수감되어 있는 [[조만식]]과의 상호교환이 제안되었으나 이는 남침 이전에 벌인 평화공작이자 북한의 기만 전술이었고, 결국 교환합의가 오가는 와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총살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도 있다.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김삼룡과 이주하를 받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교환 공세를 하였는데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자신의 라이벌이 될 만한 사람이자 북한의 영향력 있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부담스러워하여 소극적이어서 결국 부결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적인 논리로만 보면 박헌영이 전쟁나기 전에 얼른 남로당 핵심인물을 받아 오기 위해 적극적이었을 가능성은 높다. 문제는 이승만의 적극성 여부인데 조선 민족주의자 여운형, 임시정부 실력자 김구 등에게 어떻게 대접했는지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논리이기는 하다. [[이승만]]은 [[2인자]]를 인정하지도 않고 주요 독립운동가 중 실력자들과는 전부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로 [[경찰]]과 [[공무원]], 청년들을 장악하여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조만식을 부담스러워했을 개연성 자체는 충분하다. 그러나 검거 시점인 1950년 3월이면 이미 전쟁 개시 시점이 확정된 상황이었고 굳이 3개월씩이나 시간을 끈 다음 전쟁이 임박한 6월에 가서야 맞교환을 제의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한 국가급 협상이 불과 며칠 만에 끝날 사항도 아니다. 대한민국 검사 수기에 따르면 수사 과정에서 이주하는 남로당 조직 정보를 다 말하고 전향 의사를 표시했다. 재판에서 이주하는 자식에게 절대 정치를 하지 말라고 전해달라는 최후진술을 남겼고, 김삼룡은 더 이상 욕보이지 말고 죽여달라는 최후진술을 남겼는데 이것이 이들의 유언이 되었다. 그리고 정태식은 남은 생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살고 싶다고 최후진술했는데, 정태식은 살아남아 월북했다. 이주하의 이 발언은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의 최후진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데 안재성이 쓴 실화 기반 [[박갑동]] 소설에 따르면(박갑동 말을 녹음하고 대체로 그대로 글로 쓴 것 같은데 형식이 소설이라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음) 위장전향이었다고 한다. 김삼룡이 위장전향을 명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검사가 수기에서 이주하가 전향의사를 밝혔다는데 이 검사의 수기도 진실일 것이다.[[https://dongosong.net/archives/1305|해당 안재성이 쓴 박갑동 소설]] 위 실화 기반 소설에 따르면 정태식을 포함한 지도부가 검거되자 박갑동이 임시로 남로당 총책을 맡게 되었는데 박갑동은 전쟁 발발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소장파 국회의원들에게 남로당을 합법화해달라고 요구할 생각을 하고 있던 중 전쟁이 터젔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