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존여비 (문단 편집) === [[한국]] ===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여학교이니 >세상 천지에 차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성평등|남자들과 평등하자]] 앞 다투어 소리내니 >만물 가운데 이런 일이 또 어디있나 > >내칙지문과 [[열녀전]] >[[서당|아름다운 옛 규범]]이 과연 어떠하기에 >그 누가 변화를 이 지경까지 주장했나 >백번 놀라고 천 번 경악하고 가히 곡할 일이네 >---- >[[유인석]] 의암집 ▲당시 사대부들에게 있어 바깥활동은 남성의 전유물이었고, 교육을 받기 위해 전문시설(서당, 성균관)에 가는 것도 남성의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대다수의 평민들은 남녀노소 초등교육(소학) 정도만 받았었지, 학교에 가서 전문교육(성리학,경전)까지 배우진 않았다.] 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의 여성들은 그 사회적 지위가 지극히 열등하였는데,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기에, 하류층의 여성들과 달리 매우 억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이를 반증하듯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까지 있었는데, 당시 다소곳하지 못하고 시끄러운 것은 양반들의 미덕이 아니었고, 여성이 집안에서 좌지우지하여 언권(言權)을 발휘하면, [[가부장제|남성이 집안의 기둥이고 여성은 그러한 남성을 보조한다는 양반들의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여성에 대한 탄압이 심했었는지 선교사들의 기록엔 차라리 가난한 서민들이 훨씬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말까지 있었다.][* 사농공상의 신분제처럼 자신들의 권력화에 학문을 이용한것 뿐이다. 큰 전쟁 이후 1960년대에 잘못 퍼트려진 제사 문화와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와 [[조선]] 초기만 해도 딸은 상속에서 차별대우를 전혀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 등, 조선 후기의 성리학적 예법에 따른 차별적 대우와 다른 양태를 보였다. 물론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던, 고려와 조선초기도 여성의 관직진출은 불가능했었지만, 고려는 여성의 외출과 개인적인 업무에 대한 제약이 없었던 반면, 조선에 들어서면서 여성이 친가에 방문하는 것조차 막을 정도로, 개인적인 외부 활동에 강력한 제재를 가하게 된다.[* 사실 유교와 성리학 자체는 고려 말부터 있어왔지만 조선은 특히 강했었다. 오히려 고대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이것만으로 남존여비가 전혀 없다는 일반화는 어렵지만) [[데릴사위]], 즉, [[사위]]의 처가살이가 흔한 관습이었다.] 사실 계급이 밑으로 내려갈수록 이러한 제약들은 없거나, 약해졌으며, 양반과 평민은 서로가 정 반대의 세상을 살아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친족 및 상속 분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양반]]들 사이에서 부계친족제도가 강화되고 남존여비 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린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중반 이후이며, [[평민]]들 사이에선 이러한 사상은 19세기 말기쯤에 올라오다가, 20세기에 들어 급격한 근대화 • 기존의 경제체계 붕괴 • 남성에 대한 의존도 상승처럼 여러 사회적 혼란들이 겹겹이 일어나는 바람에 남존여비 사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단순한 [[성리학]] 이념의 정치적 강화에 따른 종법제도의 확립의 여파로 설명하던 이전의 이론을 넘어서, 양란 등의 [[전쟁]]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와 성 관념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조처, 혼인 이후 거처의 변화에 따른 여권의 하락, 양반 지주의 토지 확대 정체에 따른 장자상속제로의 이행의 여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하는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남존여비 풍조에 고통받았던 한 예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육영수]]인데, 육영수의 아버지인 육종관은[* 그런데 [[불륜|육종관 본인은 [[첩]]을 5명이나 두었고]] 그녀들 사이에서 자녀를 무려 20명이나 얻었다고 한다(...)] 자신의 딸이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배화여고]])의 [[수학여행]]([[일본]])도 못 가게 반대했다.[[https://blog.naver.com/son56585/220159930510|##]]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비교적 급속하게 생긴 풍습이라(특히 일반민중에게) 그 유지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위의 문제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남존여비의 해소과정은 발생 과정보다 더 급속해서 한 시대를 사는 모든 세대별로 성차별 수위의 스펙트럼이 다 다른 수준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