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리우스파 (문단 편집) === [[에페소 공의회]] === || [[파일:에페소 공의회.jpg|width=100%]] || || 에페소 공의회 묘사(프랑스 리옹 푸비에르 노트르담 성당) ||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 2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3차 세계 공의회를 431년 에페소에서 개최했다. 평생 [[수도자]]로 살았던 네스토리우스에 비해 정치적으로 좀 더 노련했던 키릴로스가 이 공의회의 주도권을 잡았다. 애초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네스토리우스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지명하긴 했으나 국내 종교 단일화를 위해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고, 테오도시우스의 누이 [[아일리아 풀케리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어릴 때 섭정을 했으며, 이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도 테오토코스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신학자들을 들들 볶아서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황제가 성모 마리아가 삶을 마친 에페소스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서 공의회가 열게 한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키릴로스와 네스토리우스에 적대적인 콘스탄티노플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적 동지들인 안티오키아 학파와 시리아 에데사의 주교들이 악천후로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고 끝내버렸다. 키릴로스는 뛰어난 논변가이며 사상가이지만 동시에 [[히파티아]]라는 여인을 살해하는 걸 승인한 냉혈한이었다. 키릴로스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으로 몰아갔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배격하는 것으로 공의회는 끝난다. 뒤늦게 네스토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도착하자 그의 주장을 따르는 학자들과 회의를 열어 키릴로스를 논박했으나 콘스탄티노플 입장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가 도리어 쫓겨나 유배에 처해진다. 뒤늦게 당시 로마 주교의 사절은 찬성 의견을 표시했고[* 사실 초기 공의회 시절은 소아시아와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들의 독무대였다. 이것이 [[교황수위권|로마 주교의 수위권]]이 무시받는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어를 사용치 않는 서방의 학자는 영 존중받질 못했는데 성서는 70인역이 그리스였고 신약은 아예 그리스어가 원본이었다. 그리스어를 모르는 야만인들은 동물처럼 꽥꽥 거리며 의사소통을 벌인다 말할 정도로 동방의 문화적 자부심은 대단했고, 로마 전성기 시절에도 로마 지배층들은 아테네나 로도스로 그리스 유학을 왔었다.]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교들과 콘스탄티노플 교회 주교들의 동의표를 얻어 [[성모 마리아]]가 테오토코스임을 재확인하고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이성론으로서 이단임을 천명했다.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이후에 [[에페소 공의회]]를 '키릴로스의 공의회'라며 씹었으며, 자신의 파벌 나름대로 회의를 소집하여 키릴로스를 축출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계속되는 논쟁에 빡친~~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가 키릴로스도 체포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와 달리 키릴로스는 탈출했고, 비상한 정치력과 막대한 뇌물로 무마하여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한다. 마침내 그는 이 기나긴 논쟁의 최종 승자가 된다. 2년 후 네스토리우스가 쫓겨난 안티오키아 주교들은 무력하게 황제와 키릴로스의 의견에 굴복했고, 네스토리우스는 강제로 유배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