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스토리우스파 (문단 편집) === [[당나라]]로 전파 === [[파일:당나라에 전래된 경교그림.jpg|width=50%]] ||7~8세기경 [[고창국]]에 전래된 경교의 전례([[성지주일]]을 묘사한 것)|| 소그드인의 대중국 교역 거점 중 하나였던 [[카슈가르]]에 대교구가 설정된 것을 계기로 7세기 초반 [[당(통일왕조)|당나라]]의 수도 [[시안(도시)|장안]]까지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다. 네스토리우스파는 머리는 [[불교]]처럼 삭발하지만 수염은 기르고, 예배할 때는 목탁을 사용하며 한역 경전을 갖추는 등의 현지화를 실시했다. 조로아스터교가 현교라는 이름을 얻은 것처럼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景敎)'''라 불리기 시작했다. 경교는 선교와 의료 봉사를 통해 중국인들의 지지와 관심을 얻으려 했다. 원래부터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의 의학 지식을 알고 있던 네스토리우스파는 성당을 세우면 인근의 병자들에게 의료 봉사[* 자그로스의 어느 그리스도인 성자는 무슬림 토후의 말을 치료해주었다 수도원에 대한 특권을 받은 적도 있다. 출처 : 기독교 세계의 등장(피터 브라운)]를 해주는 식으로 지지를 얻어나간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 방법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경교의 의사가 병자를 치료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선교사이면서 의사였던 숭인이 [[당현종]]의 맏형 이헌치의 난치병을 치료한 일. 그리고 경교의 의사가 의료 행위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로는 구당서 [[고종본기]]에 시의 진명학이 당 고종의 실명 증상을 백회혈을 찔러 치료한 일이 있다. 진명학의 치료법이 [[히포크라테스]]의 방법과 유사하고 백회를 찔러 실명 증상을 치료하는 것은 당시 중국에는 없던 치료법[* 담빈록을 보면 진명학이 백회와 뇌호 두 혈을 찔렀다고 나온다. 상세한 내용을 보면, 백회를 찔러 피를 내겠다는 진명학의 말을 듣고 [[측천무후]]가 격노하여 "'''저놈의 목을 베어라! 어딜 감히 천자의 얼굴에 피를 내겠다는 거냐?!'''" 라고 외쳤다고 한다. 신성한 천자의 신체, 그것도 머리에 피를 내겠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아예 들어보지 못한 치료법이었기 때문에 측천무후가 화를 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고종이 고통을 호소하며 찌르라고 명하고 진명학의 시술이 효과를 보여 고종의 눈이 뜨이자, [[측천무후]]는 고개 숙여 감사를 표하고 진명학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인사 받는 진명학에게 황후인 자신의 머리가 보일 정도로 크게 고개를 숙였다고 하니 측천무후가 엄청나게 기뻐했던 것으로 보인다.]으로 그리스와 아랍에서 쓰던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치료법을 알고 있던 진명학을 로마에서 온 경교도이며 성씨인 진이 로마를 뜻하는 대진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의견이 있다.[* 출처 : 중외의학문화교류사(마보영), 실크로드학 사전(정수일)] 그 외에도 경교 사원은 사제들을 전문적으로 병을 고치는 의사와 치료사로 임명했으며 배고픈 이들에게 식량을 주고 병든 이들은 치료하며 시신을 염하는 일을 했다. 이후로는 경교 신자를 휘하 장군으로 두었던 [[곽자의]]를 비롯한 유력 무장들의[* 곽자의의 휘하 장군 중에 '이사'라는 이름을 가진 경교 신자가 있었는데, '이사'라는 이름을 '이사악', '이삭'의 음차로 추측하고 있다.] 후원을 받기도 했으며 마니교와 함께 안·사의 난 이후에 세력을 확장했다. 장안 서녕방(西寧坊)에는 대진사(大秦寺)라[* 경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는 중국인들이 경교가 페르시아에서 온 줄로 알았기 때문에 파사사로 불리다가 나중에서야 대진(로마)에서 온 것을 알아서 대진사로 고쳐 불렀다.] 불리는 경교 교회가 있었고, 당 대종 건중(建中) 2년(781년)에 교회는 경교의 교리와 중국 선교의 내력을 전하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세웠다. [* 이 비석은 당나라가 멸망한 뒤에 잊혀져 있다가 명대에 서양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가 발견해 서양에도 알려졌고, 1911넌에 아일랜드의 불교 연구자 골든 여사가 일본 교토대학과 고야 산 오우인에 모조비석을 세우고 6년 뒤 우리나라의 [[금강산]] [[정양사]]에도 모조비석을 세웠다.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비석의 탁본이 소장 중이다.] 불교와 도교뿐만 아니라 서역에서 전래된 종교(3 이교)에도 관용과 호의를 베풀던 당 황실은 경교의 예배에 참여하고 경교의 대표 1명에게 관직을 수여했다. 다만, 조로아스터교는 대표 2명을 조정에 보내고 관직 품계도 경교나 마니교보다 더 높았기 때문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경교가 조로아스터교에 밀리는 편이었다. 그리고 경교는 조로아스터교에게 핍박받은 과거가 있고 중국에서는 경쟁 관계였기 때문에 경교의 경전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악마의 종교', 조로아스터의 신자들을 악마 숭배자로 비난한 구절이 많이 나왔다. 나름대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중국에서 번창하던 경교는 안록산의 난 이후 당나라에 있는 소그드인을 전멸시키라는 이른바 살호령 때문에 소그드인 선교사들이 대거 학살당하면서 침체되고, [[삼무일종]][* 987년 어느 [[수도자]]는 황제가 845년에 가한 탄압으로 중국 교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교단에 보고했다.]의 법난에 휘말려 된서리를 맞았다. 당나라가 망한 이후에도 카슈가르 대교구는 건재하였고, 몽골 부족인 케레이트족과 나이만족을 개종시키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수백년 후 위구르인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원나라로 대거 이주하여 원나라 관료로 활약했다. 중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경교 신자들은 [[명나라]] 시대에 [[이슬람]]이나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사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