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덕술 (문단 편집) === 몰락 === 그러다가 불행 중 다행히도 영원할 것만 같았던 노덕술의 부귀영화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노덕술은 특무대장 [[김창룡(군인)|김창룡]]과 권력을 놓고 암투를 벌이다 [[이승만]] 눈밖에 나면서 날개가 꺾였고, 1955년 11월에는 밀수에 가담했다는 것이 발각되어[* 정확히는 시가 4억 6천만 환(460만 원)의 미 군수물자를 밀수하는 자들과 결탁하여 수사를 가장하고 물품을 운반하는 대가로 600만 환(6만 원)을 수수받은 것이었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55111300209201010&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55-11-13&officeId=00020&pageNo=1&printNo=10086&publishType=00020|195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955년''' 기준으로 6만 원을 수수받은 것이며, 화폐가치 변동과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뇌물을 수수받은 셈이다.] 동월 11일에 재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전급료 몰수를 선고받고 군에서 예편했고 1958년에는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에 공천을 시도했으나 거절당했다. [[4.19 혁명]] 후에 열린 1960년 6월에는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울산군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는데, 이때 노덕술은 '빨갱이를 때려잡던 반공투사'라는 구호로 선거운동을 하며 자신의 '반공투사' 경력을 살려 표를 얻고자 했으나, 선거 결과는 41,109명 중 1,744표(4.24%)만 얻어 전체 후보 여덟 명 중 여섯 번째로 낙선(무소속 [[정해영(정치인)|정해영]] 당선)되었다. 당시에는 친일파라 해도 고향의 인재라면 뽑아 주는 게 보통이었고 개중에는 상당히 질이 나쁜 자들도 많았다.[* 실제로 죄악이 노덕술도 능가하는 수준이었던 최악의 친일파 [[이종형]]도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덕술이 이렇게까지 망한 것은 그가 얼마나 인망을 잃었는지 보여준다. 즉 반민특위의 처벌은 면했지만 세상의 처벌은 면하지 못한 것. 심지어 본인을 반민특위의 처벌로부터 구해준 은인인 [[이승만]]의 눈밖에 나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쓰라린 업보를 치른 셈이다. 고향을 떠난 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까지 한 번도 고향에 온 적이 없었던 노덕술은 투표 결과가 안 좋은 것을 알게 되고는 고향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그냥 갔다고 한다. [[http://www.jungpd.co.kr/board/spboard/board.cgi?id=r&action=view&gul=59|#]]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진 노덕술은 낙선 3개월 후인 1960년 9월에 [[일본]]으로 망명한 [[선우종원]]이 귀국하자 선우종원을 찾아오고는 초라한 행색에 약간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나고는 보자기를 풀어 국제 공산당 사건[* 선우종원을 [[장면]] 총리의 측근이라는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모함한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선우종원은 8년여간 일본으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관련 브리핑을 전달하고는 홍택희[* [[1948년]]에 수도관구경찰청 사찰과 부과장을 지냈던 사람으로, 노덕술의 지휘 하에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을 주도한 국회의원들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라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했으니 잡아 없애라고 부탁을 하며 마지막 권력의 끈을 잡으려고 했으나, 선우종원이 의연한 반응을 보이며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후에는 1962년경에 서울경찰청 유치장에서 사식(私食)을 넣어줬다는 증언이 전하는 것 외에는 행적이 묘연했으나, 1965년 6월에 뜬금없이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불법 [[흥신소]]를 운영한 혐의로 체포당하기도 했다. 사실 1965년 5월에 서울의 한 흥신소에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서울지검]] [[검사(법조인)|검사]]'''였던 [[함정호]]를 미행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검찰이 서울의 흥신소를 대대적으로 조사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와 함께 여러 불법 흥신소들이 적발되었으며, 흥신소 장부를 열어보니 반 이상이 개인을 미행하는 등의 사생활 침해로 채워져 있어 물의를 빚었다. 놀랍게도 함정호를 미행하던 흥신소가 바로 '''노덕술이 사장으로 있던 흥신소였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13/2016071300559.html|참고자료]][* 다만 링크에는 검사를 미행한 흥신소의 사장이 노덕술이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이는 노덕술이 몰락한 후에도 정신을 차리기는커녕 얼마나 안하무인이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며, 해방 후에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을 역임하며 '부통령급' 위상을 가졌던 데다가 헌병 중령까지 보냈던 사람이 불법 흥신소를 운영하며 검사를 미행하다가 구속되는 꼴이 되었다는 것 자체가 노덕술이 얼마나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지며 완벽히 몰락했는지를 보여준다.[* 참고로 당시 노덕술의 구속을 다룬 신문기사에서는 '흥신소 대표' 노덕술이 전직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자 한때 헌병 중령이었다는 것은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노덕술은 재판 결과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으며, 이후 노덕술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해서는 1968년 4월 1일에 서울 종로구 궁정동 22-1 자택에서 향년 68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것 외에는 그 어떠한 증언과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기존에는 노덕술이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죽었다는 말이 많았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생의 마지막 3년 동안 더 이상의 대외활동을 하지 못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나마 말년에는 사회에서 매장되고 잊혀진 채 쓸쓸히 죽으며 어느 정도의 업보는 치른 셈.[* 사실 진짜 악질 중의 악질 친일파들은 [[김태석]], [[김덕기]], [[이종형]]처럼 제 명에 가지 못하거나, [[하판락]]처럼 잘 사나 싶다가 말년에 그로 인한 [[이광우(독립운동가)|피해자]]의 노력과 폭로로 모든 만행이 폭로되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노덕술과 [[신상묵]]처럼 다른 범죄로 구속되어 망신을 당하게 되는 등 끝이 좋지는 않았다. 대한제국의 매국노들의 후손 중에서도 해방 후에 권세를 누린 경우도 실무 부역자(판사) 출신이던 [[민복기]]와 '''독립운동가''' 출신이던 [[이순용]] 정도가 전부이며 이들을 제외하면 일제강점기 시절 조상이 누리던 것과 같은 권세를 누린 경우는 '''전혀 없다.'''][* 심지어 예전에는 노덕술에 대해 '몰년 미상', '군에서 예편한 후 잠적했다' 등으로 기록된 자료까지 있었을 정도로, 국회의원 선거 낙선 후도 아닌 군 예편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