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문단 편집) == 역사 == 라인강변의 라인란트 지역은 일찍이 문명이 발달한 곳으로, [[로마 제국]] 시절엔 로마가 속주 도시들을 세우기도 했다.[* [[베젤 군]]의 크산텐(Xanten, [[라틴어]]로는 Xantum)의 경우가 그 중 하나로 현재 대규모 고대 로마 역사 테마 공원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였던 속주(Colonia)가 지금의 [[쾰른]](Köln)이 되었다. 다른 게르만 족과의 국경을 이루는 지점이 라인강이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군사적인 목적[* 앞서 말한 크산텐의 또다른 라틴어 명칭이 Vetera Castra인데, 이는 로마 군단병의 주둔지임을 뜻했다.] 의 이 강했지만 무역의 역할도 하게 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프랑크 왕국]]이 들어서자 [[카롤루스 대제]]는 [[아헨]]을 그의 통치 중심지로 삼아 왕궁과 성당을 세웠고, 쾰른과 [[트리어]], [[마인츠]]에 3개 대주교구를 설치하였다. 이 곳은 나중에 [[신성로마제국]]이 세워질 때 카톨릭측의 선제후가 될 정도로 강력한 제후들로 성장하게 된다. 카를 대제는 작센족과 전쟁을 하면서 작센 왕국의 서남부에 위치한 [[파더보른]](Paderborn)에는 주교령을 설치하였고,[* 본래 이곳에는 이르민술(Irminsul)이라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게르만족은 이를 세계수의 상징 정도로 여기며 성지로 여겼는데, 그가 작센 원정 중 파더보른을 점령하자 이교도의 상징물인 이르민술을 불태우고 주변 성지를 모조리 파괴하였다. 이후 파더보른은 1930년 대주교령이 된다.] 작센 왕국의 서부엔 작은 선교구로서 후일 [[뮌스터]](Münster) 주교령이 되는 뮌스터란트(Münsterland)를 설치한다. 결국 작센 왕국이 끝내 정복되고 그 곳은 프랑크 왕국의 작센 공작령이 된다.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할되면서 라인란트와 그 동부는 모두 동프랑크, 지금의 독일이 된다. [[신성로마제국]]이 들어선 이후 라인란트는 수십개의 백작, 주교령들로 분할되었고 그 와중에 중프랑크, 즉 로타링기아도 분열되면서 말그대로 땅따먹기의 각축장이 되버린다. 주요할 만한 공작령으로는 [[뒤셀도르프]] 중심의 베르크(Berg) 공작령, [[쾰른]]과 [[아헨]] 사이의 율리히(Jülich) 공작령, 네덜란드와의 국경지대에 있던 클레베(Kleve) 공작령이 있었다. 라인강은 무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수로로 이곳을 지나가는 무역단은 토지 소유자들에게 통행세를 지불해야했기 때문에 더욱더 바람 잘 날이 없었던 것. 라인강변은 말그대로 산봉우리 건너 성이 하나씩 들어설 정도로 빽빽해졌다. 아헨과 쾰른은 일찍이 제국자유도시로 지정되어 무역거점으로 혜택을 누리게 된다. 쾰른 대주교는 황제의 도시에서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쾰른으로 출퇴근을 하면서 궁전은 쾰른으로부터 25km 떨어진 남부의 작은 마을에 두었는데 그 마을이 지금의 [[본(독일)|본]](Bonn)이다. 최초의 작센 공작령은 현재 기준의 [[작센]] 주가 아닌 [[니더작센]]주에 위치해있었고, 그 당시의 영토 서쪽이던 현재의 뮌스터, 파더보른, [[빌레펠트]] 등을 베스트팔렌, 동쪽인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 등을 [[오스트팔렌]]으로 불렀으며, 이 것이 현재의 지명으로 전승된다.[* 여기서 팔렌(Falen)은 평지를 뜻하는 말이다. 즉 서쪽 평지, 동쪽 평지.] 다만 중부인 민덴(Minden), [[하노버]] 지역을 부르던 앙그리아(Angria),[* 정작 지금은 영국의 지역명이 되어버렸다. 영국인을 주로 이루는 앵글로색슨족을 말할 때의 앵글로가 바로 이 앙그리아 지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게르만족을 일컫는다. 색슨은 작센족의 영어명이다.] 현재의 홀슈타인 지역을 부르던 노르트알빙기아(Nordalbingia)는 지금 쓰이지 않는다. 한편 동부 영토를 개척해 큰 세를 자랑하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이 [[118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 의해 토사구팽당한 후 [[1235년]] 제국 의회에서 작센 공작령 영토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베스트팔렌 공작령이 생성된다. 이 당시의 베스트팔렌 공작령은 매우 작아 파더보른 주교령과 베르크 공작령 사이에 껴있었다. 16세기 [[종교 개혁]]이 터지면서 베스트팔렌 지역에도 개신교회들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17세기 들어 이 지역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토로 편입되기 시작하면서 개신교 세가 더 강해져 주류가 되었는데, 전통적으로 가톨릭이 강했던 뮌스터와 파더보른만이 그나마 예외였다. 결국 [[30년 전쟁]]이 터졌고,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두 세력이 평화 협정인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전쟁의 결과로 라인란트 지역은 프랑스에게 복속되었는데, 바젤 조약으로 이 지역의 제후들은 [[라인 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라인 강변의 많은 성들이 폐허가 된 시점도 이때이다. 이 시기에 이 지역엔 계몽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나폴레옹 법전]], [[관료주의]], 사법체계, 새로운 경제 제도 등이 들어왔고 구시대적인 봉건제도는 철폐되게 된다. 종교 개혁 이후에도 여전히 가톨릭 신자가 많던 라인란트는 이 때에 자유로운 분위기에 따라 개신교 인구도 크게 늘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체제]]가 들어서며 라인 동맹은 해체되었지만 이때까지 이루어진 개혁이나 사회 변화는 퇴행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로이센 왕국]]의 영향력이 강해지기 시작하는데, 이미 1609년에 클레베 공작위를 가지게 된 프로이센은 빈 회의를 통해 저지라인란트(라인란트 북부) 즉 지금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라인란트 지역과 베스트팔렌을 통째로 프로이센 영토에 편입시킨다. 한편 이때 [[오스나브뤼크]]는 [[하노버 왕국]]으로 편입된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 후 오스나브뤼크를 베스트팔렌으로 재편입 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연합국과 하노버 지역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현재도 오스나브뤼크는 베스트팔렌 지역과 문화와 언어의 궤를 같이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 라인란트 지역에선 아예 독일군 주둔이 금지당했다. 1920년에는 프랑스의 영향으로 [[자를란트]]가 아예 라인란트에서 떨어져나가 [[자르 보호령]]이 된다. 또한 이 시기에 라인란트 동부 지역 일부가 [[벨기에]]로 편입되었다. 현 벨기에의 독일어 사용 지역은 과거 라인란트였던 곳. 그리고 1936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을 무시하고 라인강 너머로 독일 군을 전진시킨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라인란트는 남북 반으로 잘려, 영국이 점령한 북쪽 즉 노르트라인(Nordrhein)은 베스트팔렌과 [[듣보잡|예나 지금이나 존재감 없는]] 리페(Lippe)와 합쳐서 현재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이[* 주 문장을 보면 왼쪽의 물결무늬는 라인란트를, 오른쪽 말은 베스트팔렌을, 아래의 --겨우 튀어나온-- 붉은 장미는 리페지방을 뜻한다.], 프랑스가 점령한 남쪽은 팔츠 지역과 합쳐져 '''[[라인란트팔츠]]'''가 되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은 새로운 주도로 전쟁으로 인해 엉망이 된 [[쾰른]] 대신 비교적 피해가 덜했던 [[뒤셀도르프]]를 선택하고, 이후 라인란트 북부의 [[루르]] 지방은 석탄과 같은 지하 광물의 개발과 더불어 운송에 유리한 지리적 장점에 힘입어 대규모로 공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독일에서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된 것. 자연스레 노조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1980년대에는 환경문제의 심각화로 녹색 운동도 활발히 이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