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무현 (문단 편집) === [[김영삼]] === [[파일:노무현_김영삼.jpg]] 김영삼은 평소에 인재 욕심이 많아서 [[손학규]], [[이회창]], [[이인제]], [[이명박]], [[이재오]], [[안희정]], [[이광재]] 등 여러 인재들을 [[천거]]했는데 노무현 역시 김영삼의 제의로 정계에 처음 입문했다.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시절 내내 인권변호사로서 명성을 얻어온 노무현을 알아본 김영삼은 그에게 정계 입문을 제안했고[* 노무현과 같이 인권변호사 일을 하던 [[문재인]]에게도 김영삼이 정계 입문을 제안했지만, 당시 문재인은 거절했다고 한다.] 노무현이 이를 받아들여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때 부산 동구에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연접 지역구였던 부산 서구 의원은 김영삼이었으며 김영삼과의 합동유세로 3허였던 [[허삼수]]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1990년, 자신을 정치의 길로 인도했던 김영삼이 [[노태우]] 및 [[김종필]]과 [[3당 합당]]을 선언하자 노무현은 그의 행동을 야합으로 보고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김정길과 함께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하였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또한 당시의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의 바로 다음 급이었던 이기택 부총재는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의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훗날, 노무현이 대선에 출마했을 때, 부산 지역의 선대 위원장을 맡으며, 부산에 초록 깃발을 꽂는 데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박찬종과 [[민주당(1990년)|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1990년의 민주당은 당시 소속 국회의원이 이기택,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 허탁 딱 8명에 불과했기에 언론에선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렸다. 이에 대해 김영삼도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훗날 노무현이 자신의 라이벌이던 김대중의 후임으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자 불편한 속내를 내보이기도 했고, "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와 같은 악평을 상당수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은 이를 맞받아쳐 김영삼에 대해서 "87년 때까지는 DJ와 함께 훌륭한 분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인의 장막|인의 장벽]]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아쉬운 심정을 밝혔다. 이후 2000년대 들어서 노무현이 [[영남후보론]]을 내걸고 [[16대 대선]] 민주당 후보로 선출되고서는 '영남 민주세력 복원'이라는 명분으로 YS를 통해 [[PK]]지역의 지지를 얻고자 김영삼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시도했다. 이에 대선후보로 선출된 다음 주에 김영삼을 예방하고는 [[금융실명제]]와 [[통일민주당]] 시절 이야기 등에 대해 서로 덕담을 나누며 사이가 다시 복원되는 듯했으나, 이 때 노무현이 예전에 김영삼으로부터 선물 받은 시계를 내보이며 '이 시계만 보면 지금도 총재님 생각이 난다'는 등 옛정을 언급했다가 YS에 대한 앙금이 남아있는 호남 지지층과 아직 IMF의 기억이 생생한[* 김영삼 사후에야 IMF는 김영삼만의 탓으로 보기 어렵다는 여론이 주류가 되며 재평가가 상당수 이루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김영삼 하면 외환위기를 불러온 역대 최저 지지율을 기록하고 퇴임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다.[[https://news.v.daum.net/v/20020217052750922?f=o|#]]] 상당수 국민들로부터 역풍이 불고 지지율이 떨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을 예방한 것 때문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 같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해 이를 듣고 화가 난 김영삼과 사이가 다시 틀어진다. 결국 김영삼은 11월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공개 지지하게 되고, 노무현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둘의 관계는 복원되지 못한다. 이때는 노무현도 김영삼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쓰며 예전에 3당 합당 건에 대해서도 서로의 갈등도 풀고,[* 3당 합당 당시에는 군사정부 세력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비판한 것이지만, 이후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 진짜로 약속을 지켜 [[하나회]]를 숙청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더 존중할 걸 그랬다라는 말까지 오고 갔었다. 김영삼과 노무현 두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 중에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한동안 서로에게 철벽을 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한마디로 이 회동은 지지율은 지지율대로 떨어지고 김영삼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기만 한 최악의 한수가 되었다. 그 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에서도 YS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운영한 탓이라며 "사필귀정"이라는 말로 냉랭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였다.[[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60583_30775.html|#]] 의외의 사실이지만, 탄핵소추안 표결 당시 국회의장이 [[상도동계]]에 속한 [[박관용]] 의장이었다. 김영삼은 참여정부 시절 내내 노무현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를 하며 대립했다. 이 중 유명한 일화가 바로 2006년 10월 11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 청와대에서 이루어진 전직 대통령 회동에서의 일화다. 당시 회동에는 김영삼, 김대중, 전두환이 참석해 노무현과 오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북한의 핵실험은 김대중, 노무현의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고 심지어 준비해온 성명서를 꺼내 "김대중과 노무현은 사죄하라!" 라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오히려 전두환이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끼리 싸우자는 거냐. 그만 좀 해라" 라고 김영삼을 말렸을 정도였다고. [[https://www.youtube.com/watch?v=QcS7ky4UpfE&t=133s|YTN 돌발영상 인터뷰에도 이 날의 상황이 남아있다.]] 이 날의 회동 외에도 김영삼은 민주동지회 신년 인사회 같은 공식행사에 참석하거나, 여러 정치인들이 상도동 자택을 예방했을 때도 노무현에 대해 두고두고 비판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9년에 노무현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은 애도성명을 내고 국민장에 참석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심기가 불편했는지, 국민장 2개월 뒤 인터뷰에서 "노무현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른 것은 이명박이 실수한 것이었다. 가족장으로도 충분했다"고 말했다. 잡지에 따르면, 김영삼은 이어 "내가 발탁해서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그는 내게 빚이 있는데, 이렇게 돼 버려서 조금 실망했다"며 "나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헌화할 꽃만 그냥 던져버리고 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김영삼의 비서실장인 김기수는 김영삼의 '가족장' 발언에 대해 "한국과 일본 모두 자살률이 높다는 기사가 나온 시점에서 각하는 '국가 지도자가 자살하면 후세를 위한 교육에 안 좋다'는 취지의 얘기를 먼저 했는데, 문맥이 거두절미되고 엉뚱한 얘기가 기사로 나간 것 같다"고 전했다며 해명했다. 다만, 김기수의 해명 또한 상당한 비판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