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논어 (문단 편집) === 여담 === 논어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영어]]로는 아서 웨일리와 찰스 뮬러, 그리고 윌리엄 에드워드 수틸(1861~1935)이 번역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일찍이 16세기 후반에 논어의 일부는 [[예수회]] [[중국]]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번역했다. 한국어 번역은 워낙 다종다양하며 동양철학 전공자들은 "괜찮은 논어 번역본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받으면 난감해한다. 번역본 종류가 워낙 많거니와 동양철학 전공자 수준이라면 번역본이 아닌 원문으로 논어를 읽기 때문. 때문에 동양철학 전공자에게 추천을 부탁해 봤자 "서점에서 죽 훑어 봐서 자신에게 적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을 고르라"는 판에 박힌 답변만 듣게 될 것이다. [[한문]] 초심자들이 논어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한다. 논어와 [[맹자]] 어느 쪽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은지는 일단 맹자가 문장이 매끄럽다는 이유로 선호도가 조금 높기는 하지만 개인에 따라 의견이 다르다. 어차피 초심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고 그러면 단문 위주로 구성되고 중의적 해석이 많아 한문 읽는 맛이 있는 논어를 먼저 읽어도 된다는 쪽도 있다. 참고로, [[이이(조선)|이이]]의 《[[격몽요결]]》은 맹자보다 논어를 먼저 읽는 쪽을 추천한다. 또한 내용을 보면 딱딱한 유교 경전의 이미지에 비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제법 있다. 공자가 제자들을 평가하면서 솔직하게 심정을 나타내는 모습이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이러저러하게 질문하고 따지자 공자도 이러저러하게 반박하고 설명하는 모습 등, 공자와 그 제자들 역시 평범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특히 자로에 대한 애정 어린 갈굼(...)은 공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공자가 혹독하게 평가하는 제자 중에서도 유독 비난당하는 제자가 있다. 그는 바로 재여(宰予). 3년상을 하지 않아도 제 맘은 편안한뎁쇼? 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책 안 보고 자다가 욕을 먹기도 하고(...)[* 다만 이 부분은 낮에 공부를 안하고 딴 짓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자로]]의 경우처럼 부족한 제자라도 나름의 장점을 인정하고 꾸짖으면서 이끌어주려는 공자가 유독 독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 자로 문서에서도 확인 가능하지만, 자로를 꾸짖는 건 어디까지나 교육이 목적이다. 그런데 재여는 인(仁)하지 않다거나, 조각도 못 하는 썩은 나무토막(...)이라며 화를 낸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재여가 사상적으로 공자와는 다른 견해를 가진 것이 아닌가라는 말도 있고, 훗날 재여가 [[제나라]]에서 반역 사건에 참가했다가 삼족이 몰살당한 뒤, [[공문십철]]이라고까지 불린 그와의 연관성을 최대한 부정하고자 유가 계열에서 재여를 깎아내리는 말을 많이 퍼뜨렸다는 말도 있다. 이래저래 흥미로운 인물. 공자가 사람을 '''[[구타]]'''한 기록도 있다. 《예기》〈단궁 하〉를 보면, 공자의 어린 시절 같은 마을 사람인 [[원양]](原壤)은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슬퍼하지 않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등[* [[패륜|어머니가 돌아가신 걸 좋아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냥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것이다.]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기에 도교 사상에 부합한다고 볼 수 있으나 공자의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논어》〈헌문〉에 이르기를, 어느 날 원양이 공자를 찾아갔을 때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거만하게 굴자 공자가 "어려서는 공손하지 않았고, 나이들어서는 일컬을 바도 없으면서 늙어서는 죽지도 않으니 네놈이 바로 도적놈이다!" 라면서 원양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렸다'''는 기록이 있다~~늙으면 죽어야 돼 하면서 사람을 팼다~~ 공자가 대노했다는 해석도 있으나 실제로 대노했다는 기록은 없이 위의 언행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김용옥]]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여, 사실 이것은 공자의 소탈한 면모를 보여주는 자료들 중 하나로, 못난 친구를 농담조로 힐난하며 투닥대는 흐뭇한 모습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기사가 고전 한문으로 기록되고, 공자가 이제껏 기계적인 성인으로만 해석되어서 다만 준엄한 꾸짖음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짜식, 왜 사냐?" 정도의 수준이라는 것. 사실 원양은 단순한 공자의 동향인이 아니라 정말로 공자의 죽마고우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불렀다는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이렇다: 원양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공자가 그 겉 널 짜는 일을 도왔다.''' 헌데 원양이 목재위로 올라가 말하기를 "내 어머니의 상을 당한지도 오래되었고, 감정을 음률에 맡기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다" 하며 노래하기를 "너구리 머리 털 반드러움이여, 여인 손 잡은 듯 보드랍네!(나뭇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 하였다. 공자가 그냥 못 들은 체 하였는데, 제자들이 "선생님께서는 저 사람과 사귀기를 그만두지 않으시려는지요?" 하였다. 이에 공자가 답하기를 " 구(丘, 공자의 이름)는 들었노라, 친우(親友), 그 친(親)을 잃지 말 것이며, 고우(故友), 그 고(故)를 잃지 말 것이라!" 하였다. 이 기사를 감안할 때 김용옥의 주장은 나름 설득력이 있다. 논어를 공자의 저작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정작 공자 본인은 단 한 권의 저술도 쓴 적이 없다. 잘 알려진 [[춘추]]나 시경 등도 [[술이부작]](述而不作), '그대로 서술하되 창작하지는 않는다' 의 원칙하에 '''편집'''하기만 했을 뿐이다. 혹자는 공자가 나름의 원칙을 가지고 편집, 즉 술이는 술이인데 완전히 부작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하지만 공자 본인의 편집 철학은 술이부작이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웬만한 사상가나 종교의 [[교조]]는 스스로 책을 쓰는 일이 없다. [[꾸란]]도 [[무함마드]]가 한 말을 후세에 정리한 것이고,[[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담은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석가모니]]의 [[불경]]도 그렇다. 하다못해 공자와 비견될 만한 [[소크라테스]]도 <[[변명]]> 등에서 [[플라톤]]에 의해 그 사상이 쓰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렇기에 후세의 제자들에 의해 스승의 주장이 재단당할 확률도 없지 않게 있고, 그래서 욕도 먹는 게 사실이다. 초대형 규모의 사상집단의 교조급이 직접 자료를 남기는 경우는 기껏해야 도가의 노자가 남긴 노자([[도덕경]]) 정도. 그마저도 사후에 도가가 다른 형태로 흘러가면서 종교화된 것이라 이마저도 얘기가 조금 다르긴 하다.(노자 당대의 죽간본과 현대에 전해진 도덕경을 비교해보면 그 사상의 차이가 적지 않게 난다. 자세한 것은 [[노자]] 항목 참조.)][* 메이저 급은 아니나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종교 가운데에 [[원불교]]가 [[박중빈|창시자]]가 살아있을 때에 교리와 경전을 확립한 바 있으나, 이 또한 박중빈이 직접 저술한 것은 아니고, [[송규]] 등 핵심 제자가 글을 써오면 감수하는 형태였다. ] [[성균관대학교]]의 졸업 필수 과목이다. 역대 중국, 한국의 왕조들과 일본의 천황가, 쇼군가, 다이묘들도 배우는 학문 중 하나였다. 근대 일본의 기업가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논어와 논어의 가르침을 살면서 굉장히 중요시 여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