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누란 (문단 편집) === 멸망 === 2세기 초반의 누란은 후한의 영향 하에서 경제적으로는 번영했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들어가면서 [[삼국시대(중국)|후한 말의 동란]] 때문에 서역에 대한 중화 왕조의 영향력은 저하되었으나 3세기 후반 중국을 통일한 사마씨의 [[서진|진나라]]가 서역으로 영향력을 확대시켜갔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화북]]의 [[팔왕의 난|지배권]]을 [[영가의 난|상실]]하면서 이른바 [[오호십육국시대]]가 도래했다. 이 시대에 양주의 지배자가 된 [[전량(오호십육국시대)|전량]]은 서역으로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고 서기 335년 전량의 장군 양선의 공격을 받은 누란은 [[쿠차]] 등과 함께 전량에 입궐하여 당시의 누란의 왕이었던 원맹은 [[여자]]를 조공하였다고 한다. 전량은 서역 지방의 통제를 강화시켜나갔고 이후 누란은 뒤이은 북량의 지배자에게도 입조를 계속해나갔다. 전량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누란의 왕 휴밀타는 스스로 서역도호 설치를 요구해 [[382년]]에 전진에 입궐한다. 휴밀타 다음의 왕인 고원질은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과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의 싸움에서 전진에 원군을 보냈다. [[422년]]에는 누란의 왕 비룡이 [[북량]]에 입궐했다. [[439년]] 북위의 [[북량]] 침공이 시작되면서 북량은 패배하였고, 그 지배자인 저거무휘(沮渠無諱)와 저거안주(沮渠安周)[* 흉노에 예속되어 있었던 [[노수호]]의 후손이다.]는 [[둔황]]을 경유해 가오창으로 후퇴하려고 했다. 이 결과 그 도상의 중요 거점인 누란을 제압하고자 441년에 안주가 누란을 공격했다. 누란은 첫 공격은 격퇴했지만, 다음 해 저거무휘가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누란으로 쇄도하자, 패배를 깨달은 누란의 왕 비룡은 4,000명 남짓되는 인원과 함께 차말(체르첸, 현 중국 체모 현)로 피했다.[* [[위서(역사책)|위서]]에 의하면 이것은 누란 인구의 반에 이르는 숫자였다고 한다.] 결국 [[445년]] 누란은 [[북위]] 치하로 들어갔고, 누란의 왕은 도망가버렸다. 그리고 [[448년]]에 교지를 내려 한목이 선선국(누란)의 왕에 봉해졌는데 문제는 통치형식은 군현을 설치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결국 독립된 왕국으로서의 누란의 역사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나라는 망했어도 도시 자체는 7세기 무렵까지 존재하였으나 [[5세기]] 이후부터 쳐들어오는 [[토욕혼]]이나 [[튀르크인|튀르크 유목민들]]로 인해 [[630년]]경 누란 주민들이 [[하미시|하미]]로 이주한 일을 계기로 누란은 점차 주민들에게 버려지기 시작했다. [[644년]] [[현장]]은 [[인도]]의 [[바르다나 왕조]]에서 [[당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누란에 위치해있던 나박파(納縛波)[* [[소그드어]]로 "새로운 물"이란 뜻의 "Navapa"의 [[음역(번역)|음역]]으로 추정됨.]란 마을을 지나쳤다고 하는데, [[확인사살|성곽은 존재하나 사람의 흔적은 없었다고 기록했다.]] 이후 누란 일대는 [[토번 제국]]이 지배했다가 10세기 무렵 위구르인들이 이주해와 현재에 이른다. 다만 사막화된 누란 지역은 옛 성터 유적지를 제외하면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금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 게다가 해당 지역이 중국군의 군사 지역[* [[중국의 핵개발]] 당시 핵실험을 이 일대에서 진행했다.]으로 지정되어서 특별히 허가를 받지 않으면 방문 자체가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